죽교동 주민자치위원회 전 자치위원장 김도중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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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교동 주민자치위원회 전 자치위원장 김도중 어르신
  • 최지우
  • 승인 2016.12.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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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나 호출하면 달려오는 죽교동 인간 신문고’
 

50년 거주 가난한 동네 30년 동안 봉사와 헌신
2달 시한부 아내 대체요법과 식이요법 21년 간병
71세 나이 숫자 뿐 죽는 날까지 동네 위해 일할 터


남들보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유달산아래 보금자리에서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와 개구쟁이 세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건실하고 믿음직한 가장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일흔 한 해 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아쉬웠던 일도 많고, 후회되는 일도 많지만 꽤 부리지 않고 열심히 우직한 한 생을 살아왔노라 자신할 수 있다. 병든 아내를 위해 21년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손수 병간호를 하며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굳은 절개를 지켰다. 30년이 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난한 동네를 위한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 나이 71살, 아직은 쉴 수 있는 나이가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경로당에도 나가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동네 이곳저곳을 살핀다. 이상은 죽교동 주민자치위원장이었던 김도중 위원장의 삶의 단편적인 이야기다. 김도중 위원장의 감동 인생스토리가 연말 지역사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목포시는 지난 19일 목포축구센터에서 그동안 각 동에서 주민들의 생활편익을 위해 애쓰다 그만둔 10명의 자치위원장들에게 공포패를 전달하고 그 노고를 위로하고 치하했다.

그중 71세의 고령에도 50년 넘게 죽교동에서만 생활하며 죽교동을 위해 봉사하며 희생해온 김도중 자치위원장의 감동적인 얘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김도중 위원장은“주민자치위원회는 동네주민을 위한 조직이다. 그동안 동의 환경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일을 해왔고, 동네를 위한 활동을 했다. 동의 발전이 곧 시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고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김도중위원장이 동네일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죽교동은 목포시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으로 꼽힌다. 그러다보니 환경이 열악하고 먹고 살기 바쁜 동 주민들에게 바랄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보다 잘 사는 동네를 만들기 위한 주위의 추천과 동사무소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된 동네돌보기가 30년을 훌쩍 넘겼다.

처음 동개발위원을 시작으로 자문위원, 자치위원까지 그야말로 죽교동의 산 증인이다.

오랫동안 동네일을 봐 왔기 때문에 동사무소 직원들 보다 동네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김위원장에게 먼저 연락이 온다고 한다.

죽교동은 지역특성상 어르신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정들이 많이 있고, 도움을 바라는 어르신들도 많이 있다. 독거노인들이 병이 나거나 도움이 손길이 필요로 할때, 지역 주민이 병원비가 없어서 도움을 호소할 때 연고가 없는 주민의 사망 시 사망처리를 하지 못할 때 김도중 위원장이 나서서 해결을 한다.

김위원장이 자치위원장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중 가장 큰 성과가 쓰레기 문제였다.

김위원장은“자치위원을 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일이 쓰레기배출에 관한 일이였다. 동네에서 아무데나 아무시간에가 쓰레기를 갖다 버리다 보니 주변 환경이 지저분해지고 위생 또한 엉망이었다. 그래서 자치위원들과 협의해서 쓰레기배출 시간과 분리수거를 잘 하자는 캠페인과 함께 쓰레기 배출 단속을 했었다. 처음엔 반발도 있었지만 동네사람들의 협조로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고 했다.

죽교동에는 6개 학교가 있으며 학교 밖 아이들이 방황하고 불량스런 행동으로 패싸움을 벌이거나 골목길을 막고 담배를 피우던 청소년위해 환경 집중 단속 지역이었다. 주민자치위원들이 매주 저녁 당번을 돌며 청소년들을 집중 단속과 선도를 하면서 불량 청소년이 많이 줄어든 점도 만족스런 성과로 꼽았다. 젊었을 때부터 태권도를 하며 도장을 운영했던 경험이 아이들을 제압하거나 훈계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도중위원장은 화순이 고향으로 초등학교 때 전 가족이 목포로 이사를 오면서 목포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월남전에 참가했다 돌아온 김위원장은 제대 후 목포시 선수를 지낼 만큼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태권도장을 운영했었다. 열심히 뛰었지만 가난한 생활의 연속 이였다.

가난을 피하고자 당시 한창 인기 있었던 갯지렁이 판매를 시작하며 조금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도 잘 커주었고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 50대 초반에 아내가 병이 났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수술하면 두 달, 수술을 안 하면 한 달이라는 시한부선고를 받았다. 고대 안암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그때부터 5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1년 동안 대체의학과 식이요법으로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고 아픈 과거를 밝혔다.

최선을 다해 병간호를 했던 아내를 향한 사랑과 이제는 김위원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삼형제의 효도는 김위원장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김위원장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을 살피고 새로운 것이 보이면 확인하고 물어보면서 마을을 살핀다.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로 하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동네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치위원장을 하면서 지켜보니까 죽교동은 복지 쪽에 많은 필요를 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을 겪은 사람들을 보면서 복지혜택이 제대로 돌아갔으면 좋겠고 더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동과 유기적으로 대처 해야겠다”는 바램과, “현재 죽교동의 가장 시급한 현안인 목포대교와 서해안이 개통되면서 치르는 출퇴근길의 정체현상과 학교 등하교시간 때의 주차 전쟁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고, 죽교동 시장의 현대식 건축이 꼭 필요하다”고 시에 대해 건의도 잊지 않았다.

때로는 그만하고 싶어서 잠깐 쉴 때도 있었지만 봉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조금 노력하고 희생해서 주변이 좋아지고 행복해 진다면 좋은 일이기에 동네 신문고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김도중 자치위원장의 늙지 않는 하루하루.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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