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읽기 - 5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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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읽기 - 5월이 간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5.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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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희 전 정명여고 교사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아마도 복도에서였던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명상록이라는 걸 쓰게 했는데, 선생님께서 내 걸 보셨던지,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셨다.
첫마디가 “글을 써라.”였던 것 같다. 나는 선생님께 수업을 듣지는 않았다. 영혼은 들끓었지만 현실은 나약했던, 세상과 동떨어져 친구와 단 둘이 섬처럼 사춘기를 지나가던 소녀시절, 선생님은 내가 믿고 의지하던 거의 유일한 <어른>이셨다. 마음은 두루두루 따뜻하셨고, 나약한 나를 한 번도 야단치거나 북돋우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괜찮다고 하셨고, 언제나 “너는 글을 써라.”고 하셨다.

대학에 가서도 만날 때마다 듬뿍 책을 안겨 주셨다. 국제서점 앞에서 선생님이 사주신 책을 안고, 익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던 때가 지금도 선명하다. 부모님이 경기도로 이사를 가신 뒤에도 나는 선생님을 뵈러 고향에 내려갔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그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면 나는 선생님을 떠올린다. 나에겐 선생님께서 바로 그 사람이시다.

내가 점점 단단해져 가고,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럴 때마다 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그저 나약했던, 부족한 것도 답답한 것도 많았던, 고집 세고 잘 울었던 한 아이에게 무한 믿음을 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그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다고....
한번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
 
스승의 날 즈음에 솔이가 페북에 올린 글이다. 솔이는 중학생을 둔 엄마다. 한의대를 다니던 1990년에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다. 뜨거운 젊은이로서 방황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가끔 공중전화에서 ‘선생님, 힘들어요.’ 했다. 그러다가 힘이 부치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이 이해관계이거나, 양심과 정의의 문제이거나, 친구 때문에, 사랑 때문에 방황하다가 문득 찾아 와 이야기를 건넸다. 그럴 때마다 ‘글을 써라. 네 삶이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다.’ 라고 말하곤 했다. 맑은 영혼을 가진 젊은 제자와 함께 하면서 오히려 나는 세상에서 살아가느라고 생긴 때를 벗을 수 있었다.   

내게는 솔이 같은 제자들이 많다. 시대가 그랬다.

고3 때 5.18을 만나 인생이 바뀐 아이들이 많다. 순이도 그 중 한 명인데 대학에 가서 연극을 했다.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아마도 일본인 순사 역할을 맡아 우리 민족을 패대기치는 역할을 맡았더란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역할을 바꾸었다. 그 결과 일본인 순사에게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병원에서 수술했다며 귀를 보여준 제자였다.  

순이에게는 형사가 늘 옆에 붙어 다녔다.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고, 싸온 도시락을 권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빨리 집에 가서 문제가 될 만한 책이 있으면 빨리 없애라고 했다. 불온서적이라고 할 것도 없는, 서점에서 산 책을 치운지 얼마지 않아 단칸방에 그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서 힘든 시절, 노대통령을 사찰하던 안기부의 이화춘 요원이 격월로 월급을 갖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봤다. 그러고 보면 나쁜 정치인은 있어도 나쁜 한국인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된 일화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승희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무력함으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분신하기 몇 개월 전, 승희가 학교에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혼자 왔다. 짜장면 한 그릇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다. 그 얘의 어떤 면에서도 죽음을 선택하려는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운 청춘이 못된 어른들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우리들 앞에서. 

시사인의 고재규 편집국장은  2017. 5. 27호에 머리말로  ‘기억하겠습니다’를 썼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사에 담았다며 그대로 실었다. 그리고 국립 5.18 민주 묘지와 망월동 옛 묘지에 묻힌 이들의 이름을 함께 올렸다. 그들의 이름 속에 박승희도 있다.

한강의‘소년이 온다’는 책이 만들어진 배경에, 1980년 5월 27일 광주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 여섯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가 있다.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하나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처럼 우리 애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리 애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게 슬프다. 어른으로서 죄의식이 있다. 살아남았으므로. 더 이상 이 땅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로 시달리지 않아야 한다.

힘들고 어렵고 슬펐던 그 5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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