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도시 목포 왜, 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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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도시 목포 왜, 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인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6.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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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 매립도시, 섬을 둘러싼 러일의 각축 - 강봉룡 목포대 교수

목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 국내외의 정책과 동향이 급변하면서부터였다. 3개 항(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으로 조선의 해금정책은 폐기되었고 섬에는 이미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어느덧 목포는 인근 도서연안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조운선을 관리하는 중심 거점 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880~90년대에는 독일 선박과 일본 선박을 조운선으로 임대하여 목포에서 운용한 것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목포는 중국 상해와 일본 나가사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통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1) 良港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먼저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에 의거하여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조약개항’)을 주도했던 일본이 네 번째 개항지를 물색하던 중 목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러시아도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하여 목포를 호시탐탐 노렸다. 타율적 ‘조약개항’의 불평등성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조정 역시 목포를 주목하면서 자주적 개항을 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이 선수를 쳤다. 1895년 조선정부에 강요하여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고 이에 의거하여 목포에 대한 타율적 ‘조약개항’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이 허를 찔렀다. 1897년 7월 3일 의정부에서 목포 개항을 전격적으로 의결하고 그 다음날 고종이 이를 재가하여 칙령으로 10월 1일 개항(‘칙령개항’)을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선수를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더 나아가 목포 개항장에 일본인만을 위한 ‘전관거류지’를 설정해 달라는 일본 측의 집요한 요구를 거부하고 각국 사람들이 공용하는 ‘각국거류지’로 최종 낙착하였다. 더 나아가 개항장의 제반업무를 관장하는 무안감리서를 개항 직전인 9월 12일에 설치하고, 개항과 동시에 목포해관을 작동시켰던 것 등으로2) 미루어 보아 목포 개항을 위한 조선 조정의 준비 과정이 상당히 치밀했음을 살필 수 있다. 목포에서 처음 이루어진 자주적 개항(‘칙령개항’)의 경험은 이후 1899년 군산, 성진, 마산항의 개항에도 전범(典範)이 되어 적용되었다.

그런데 난관이 있었다. 목포가 양항의 조건을 갖추긴 했지만 모든 것이 구비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약점은 큰 항구를 운영할 배후 부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매립하는 험난한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 매립 계획은 1895년 일본에 의해 처음 구상되었고, 준비 과정을 거쳐 1899년에 바다 매립을 위한 해벽공사가 착공되었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 매립 공사를 거치면서 ‘매립 항구도시 목포’로 재탄생하게 된다.

바다 매립을 통해 토지를 확보하는 것은 재원과 시간과 시행착오를 요하는 지난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목포 인근의 섬 토지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랬던지 일본과 러시아가 섬 토지 침탈에 나섰다. 그 대상은 삼학도와 고하도였다. 일본인 상인 시부야 타쯔오(澁谷龍郞)가 국유지인 삼학도를 옛 목포진 관리였던 김득추로부터 불법 매입하면서 토지 침탈의 단초를 열었다. 고하도 토지 침탈전은 개항 직후인 1897년 12월에 러시아에 의해 촉발되었고, 여기에 일본이 개입하였다. 조선 정부와 무안감리서가 이를 저지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후 목포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해오던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각축은 러일전쟁을 고비로 일본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전쟁의 승패에 섬이 개재되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은 러일전쟁기에 신안군 다도해의 요소에 자리한 옥도라는 작은 섬에 ‘팔구포방비대’라는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해군주둔지 및 병참기지로 활용했다고 한다. 러일전쟁이 황해 해전으로 촉발되었던 만큼, 일본이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면에 섬을 군사기지화 하여 서남해 다도해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했던 사정이 작용하였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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