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화운동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3
상태바
6월 민주화운동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3
  • 류용철
  • 승인 2017.06.27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③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결성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유화조치 이후 목포 지역의 운동의 지형이 변화하였다.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문화운동은 소수의 문화적 역량을 보유한 활동가와 조직구성 능력을 가지고 있던 활동가를 중심으로 강연회 등의 대중 활동을 통해 새로운 단체로 변화 발전하며 문화운동부문에서 전문성을 강화했으며 YMCA라는 교회조직의 지원과 후원을 받으며 그 토대를 만들어 갔다.

또한 이 시기는 문화운동에서 그간 연행 분야에 치우쳐져 있던 활동이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로 YMCA놀이패 갯돌 내의 연행, 미술, 문학 분과의 분화를 들 수 있으며, 청년 목 민회, 새벽클럽 등 독서클럽의 조직이 그 성과라 할 수 있다. 독서클럽의 조직으로 문화계 운동가들 외 타 분야의 운동가들이 결집하여 함께 논의하는 장을 들 수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구조 속에서 1983년 9월 30일 김근태를 의장으로 한 민주화운동(전국)청년 연합이 창단식을 가지며 공개 대중 조직을 지향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공개정치투쟁단체의 건설은 지역의 운동가들에게 새로운 반향을 일으킨다. 1984년 들어서는 인천사회운동연합, 전남사회운동연합 등 지역사회운동연합이 대중조직노선의 기치를 들고 각 지역에서 창립된다.

이는 목포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의 운동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목포 지역에서도 ‘목포사회운동연합’과 같은 조직을 만들자는 제의가 양지문, 곽재구 등 청년층에서 제기되어지며 활발하게 논의를 이끌어간다.

이는 80년 5월 항쟁 이후 침체된 체 특정 분야의 운동으로 명맥을 잇다시피 하던 지역의 민주화 운동이 재야, 정당, 종교를 비롯해 청년, 학생, 문화 등 각 부문별 활동이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지역운동을 선도하기 위해 연합운동단체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직 건설의 논의는 이후 1985년 상반기에 상당히 진척되어 갔었으나 안철 등을 중심으로 한 재야진영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함으로써 조직구성에 실패하였다.

이에 조직결성에 동의하였던 상층인사들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청년층을 중심으로 우선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가칭 ‘목포사화운동청년연합’으로 하기로 한다.

1985년 9월 16일 YMCA 강당에서 100여명의 청년과 민주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목포사화운동청년연합(이하 목청련)’의 창립대회를 갖고 출범했다.

목청련은 회칙에서 그 목적을 민주 청년의 단결된 힘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족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노동청년 및 농어민 청년, 도시빈민청년, 여성청년을 비롯한 모든 일하는 청년들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주요 활동의 목표를 1) 모든 일하는 청년들의 민주적 제 권리 실현을 위한 활동 2) 일하는 청년들이 참된 민주주의 깃발 아래 굳게 단결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련 활동 3) 일하는 청년들의 권리향상과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 홍보 및 조사활동 4) 일하는 청년 대중의 올바른 정치적 입장 제시 및 이의 실현을 위한 실천 활동 5) 민족, 민주세력의 행동통일을 위한 노력과 결속을 다지는 사업과 활동 등으로 삼았으며 이를 회칙에 명시하고 있다.

초대 의장에 양지문, 운영위원장에 곽재구, 운영위원회 산하 각 부와 국에 최문, 문상기, 한봉철, 김일, 김정모, 이현희 등이 인선되었다.

또한 지도 위원으로 임기준, 배형남, 박광웅, 김현삼, 조명철, 최형주. 김청수 등이 참여 하였다.

목청련은 목포지역에 결성된 최초의 공개대중 사회운동단체라는데 그 첫 번째 의의가 있다.

또 목청련의 창립은 목포에서도 애국적인 청년들이 앞장서서 잘못된 지역의 현실과 제도를 바로 잡아나가고, 자주화와 진정한 민주주의,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싸워나갈 것을 결의 한 첫 걸음이었다.

목청련 집행부와 회원의 구성에서 특징은 기독교장로회 측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목포지역은 과거부터 교회 쪽의 활동이 특히 많은 지역 중의 하나였다. 특히 기독교청년회(이하 기청), 가톨릭청년회(이하 가청), 예수교장로회청년회(이하 장청) 둥 교회 청년회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가청은 가톨릭계의 청년회로서 그 활동영역이 상당히 독자적이었으며 장청은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에서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청의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목사님들의 활동도 두드러져 임기준, 김현삼, 조명천, 유기문 등은 80년 5월 민중항쟁 시에도 주도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또한 80년 5월 민중항쟁 과정에서 시민투 위원장을 수행한 안 철은 전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연합의 회장으로서 목포해양대학교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목청련의 양지문도 중앙교회 기청회원으로서 활동했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창립되어진 목청련이었기에 종교청년회 계통의 사람들이 두드러지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리=유용철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