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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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보다-4
  • 류용철
  • 승인 2017.07.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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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 민주화 활동
▲ 지난 6월 강상철 열사 추모식에 참석한 부친이 열사 묘에 헌화하고 있다.<강성휘 도의원 제공>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1985년 9월 16일 목청련 결성 이후 우선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에 결부된 문제로서 수돗물 오염문제의 해결과 높은 수도세의 인하를 요구하며 각종 설문조사 활동과 선전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수돗물의 가격은 책정에서 시행, 공급까지 모두 지자체에 일임되어 있었다. 때문에 지역마다 해당 지자체의 부채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목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약 2-3배의 비싼 가격으로 수돗물이 공급되고 있었다. 목청련이 수도문제를 제기하자 부당한 피해를 입던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 시기 목포의 수돗물은 지금처럼 주암댐의 물을 수원지로 하는 것이 아닌 영산강의 지표수를 무안군 몽탄면에 소재한 몽탄 정수장에서 화학 처리 한 것으로 그나마 좋은 물은 함평 대동댐에서 끌어오는 물이었다.

영산강 분뇨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목포 사람들은 광주사람들이 싼 똥 오줌 먹고 산다”할 정도로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는 광주와의 자존심 문제까지 얽혀 있었던 것이다. 목청련은 수돗물 문제를 적극 제기함으로써 시민들에게 한 걸음 다가 갈 수 있었다.

대중노선을 표방하며 만들어진 조직이기에 최초의 사업도 주로 시민들과 쉽게 접할 수 있는 투쟁들이었다.

수돗물 문제는 기본적으로 민중의 생존권 문제와 국민들의 평등한 수혜의 권리, 다른 것도 아닌 필수 공공재를 다루었다는 것으로도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수돗물 수질 개선 사업은 광주의 전남사회운동청년연합에서 모범으로 삼을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수돗물 관련 사업으로 힘을 얻은 것도 있지만 정치적인 투쟁 부분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움도 있었다.

정치 투쟁을 하면서 주장을 알려야 할 때인데 제대로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당시의 지역 운동을 본다면 조직을 만드는 시기였던 것이다. 완성된 조직으로 투쟁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없는 곳에서 만들어 냈어야 했기에 제일 힘든 시기였 다. 하지만 목청련은 대중에게 접근하려 했었고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많이 만들어 내야 했다.

그리하여 ‘북소리’라는 신문을 발행하면서(지금의 목포의 소리) 시민들이 알아야 할 문제를 알리고 외세와 군부독재의 본질을 폭로하는데 온 힘을 실으며 대중들에게 접근하고자했다.

목청련은 1986년의 개헌정국에 맞추어 개헌서명운동과 개헌투쟁을 주도했으며, 5월 17일에는 80년 이후 최초로 목청련 주최로 『5.18 광주 목포 민중항쟁 계승 및 실천 결의 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은 5월 항쟁의 의의를 시민들에게 널리 선전하고 그 뜻을 이어 받아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6월 6일에는 목청련 사무차장으로 있었던 강상철이 ‘군부독재 타도’와 ‘민중 생존권 쟁취’를 외치면서 목포역 광장에서 분신, 산화 했다. 강상철은 1985년 목포에 목포민주주의국민회의 보 사무실에서 민주화 운동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다.

그는 목포 전문대학교를 휴학 중이었고 정당과 야당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현희와 기초학습을 시작하면서 강상철은 적극적인 청년 활동가로 탈바꿈했었다.

분신 이후 강상철은 골룸반 병원으로 옮겨진다. 목청련 회원들은 교대로 병원을 지키며 분신 속보를 제작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병상 투쟁이 20여일이 지나가면서 갑자기 강상철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6월 25일 분신 20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목포 지역 민주세력들은 목청련을 중심으로 하여 굳게 뭉쳐 ‘강상철 열사의 분신 항거’의 뜻을 널리 알리고 범 국민시민장으로 장례를 집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강 열사의 가족은 작은 아버님을 통해 전해지는 회유와 협박에 한 걸음을 물러서게 된다.

경찰은 새벽에 갑자기 열사의 시신을 암중에 빼돌리고 완강히 저항하면서 장례를 치르고자하는 민주시민과 청년들을 무차별하게 탄압했다. 그때 당시 목청련의 힘이 부족하여 강상철 열사의 시신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당시 회원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한편 목청련은 범국민적인 KBS시청료거부투쟁과 목포여자상업고등학교 재단의 비리를 폭로 한 문희경 교사에 대한 지원활동을 펼치며 문희경 선생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 할 것을 요구하는 둥의 투쟁을 진행한다.

그러던 중 86년 9월 1일 목포대학교에서 ‘반제민족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이하 반반투)가 부천 성고문 사건에 항의하여, 성고문 자행 파쇼타도, 미제 축출 민족자주수호를 구호로 내세우며 무안경찰서 청계지서 타격투쟁을 벌인다.

반반투의 학생들은 청계지서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화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청계지서의 사환 모용환 군이 불을 끄기 위해 소화기를 사용하던 중 소화기의 폭발로 부상을 당하고 병원으로 이송 중 결국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반반투 위원장 정병수 등 16여명이 경찰에 수배를 당하게 되고 청계 농협 2 층에 비상 상황실이 설치되어 운동권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가게 된다.

이로 인해 목포대학학생들은 매일 불심검문에 시달려야 했다.

윤소하 등 2-3 명의 청년들은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수배학생들을 피신시킨다. 결국 10월 8일 반반투 위원장 정병수와 배태공이 목포 민정당 당사 농성을 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활동했던 윤소하도 범인 은닉죄로 구속된다.

반반투 사건을 계기로 목포지역의 청년 학생 운동에도 탄압이 가해진다. 하지만 이런 탄압의 국면에도 더욱더 조직적인 사업과 대중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86년 11월 18일에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와 함께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을 구성하고 광주지역위원회와 목포지역위원회를 출발한다.

1987년 4월 26일에는 수강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그 간의 활동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결의하고 조직 정비사업과 함께 초대의장 양지문에 이어 이현희가 의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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