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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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가는 길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7.0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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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칼럼
▲ 박영동.

달은 차면서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게 마련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 끝에는 또 다른 오르막이 있다. 사람의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 뒤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재회의 기쁨이 있다.

이는 자연의 이법임과 동시에 인지상정인 것이다. 우리가 삶의 생명줄을 붙잡고 열심히 살아가는 동안 위 같은 공전은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어떠한 기준인지는 몰라도 영암 월출산은 전국 8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고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천황 봉, 구정 봉, 시루봉 등이다.  그중 구정 봉 정상의 8부 능선에 백제유민들이 망국의 설움을 달래어 부흥운동을 하면서 미래에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마애석불을 새기고, 간절하게 염원을 담은 기도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용암사가 있었다 한다.

22살이 되던 해인 1978년 여름 장마철, 동네 형과 함께 잠깐 동안 세상사 잊어버리고 수양이나 하자고, 생전에 처음인 암자를 향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적이 있었다.

산 아래서 눈으로만 보았던 월출산은 실제로 보니 경사가 심하였고 등반 중에 보이는 바위는 크기나 모양새로 나를 압도하였으며, 큰골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산 능선과 겹쳐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과, 발길을 옮기면서 변화하는 바위의 형상, 기암괴석에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까마득한 소나무들은 어쩌면 신비롭다고나 할까. 정말 짜릿한 장면이었다. 한참을 오르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장마 비가 쏟아져 물러서지도 못하고 나아가기도 힘들었지만, 얼굴을 덮어 흘러내리며 시야를 가리는 빗물을 연방 손으로 훔쳐내며 한발 한발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나 있으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보따리의 책과 옷가지 등은 물을 먹어가면서 점점 무거워 내 어깨를 짓누르고 불어난 계곡물은 우리를 한층 더 위태롭게 하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세 시간여의 사투 끝에 암자에 도착하였다. 전에 있었던 큰절인 용암사는 어떻게 하여 허물어 졌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돌과 흙을 개어 산골 초가집처럼 지은 방과 재래식 부엌, 법당이 있었고 아래쪽으로 우물이 있었다. 일단은 군불을 지펴 따뜻한 밥을 짓고 가지고 간 감자로 된장국을 끓여 맛있게 나누어 먹고 나니, 누구의 간섭도 없는 참다운 평화가 찾아오면서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세상과 통하는 것은 오로지 손바닥 만한 주지 스님의 라디오인데 스님은 어디를 가셨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다음날 비가 갠 월출산을 아래로 굽어보고 위로 올려다보니 모두가 신이 내려준 하나의 작품처럼 경이로울 수가 없었다. 멀쩡하던 산꼭대기에서부터 구름이 넘어오는 모습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 순식간에 구름 속에 사람을 가두기도 하고 꺼내 놓기도 하였다. 바위 턱에 앉아 있는 한나절이 지나자 형은 자꾸만 산 아래를 굽어보더니 몸이 아파 약을 사먹고 올 테니 잠간만 혼자 있으라고 하였다. 애초부터 복잡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탓에 태연하게 잘 갔다 오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산에서 그 형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깊은 산중에 구름이나 나무나 새들에게 소식을 물어볼 수도 없었고, 암자를 놓아두고 그대로 산을 내려 갈수도 없어 꼼짝없이 얽매인 몸이 되어 버렸다.

내려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지스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언제 주지스님이 오시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날이 개는 잠간 동안 멀리 산정에 등산객의 울긋불긋한 옷도 보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지고 대화 상대가 없는 그 자체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루하여 답답한 가슴을 달래려고 무작정 책을 들고 처음부터 읽어 나가는데 하루가 몇 날인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데다 보고 또 보게 되니 그 뜻은 명확하지만 가슴은 늘 허전하였다.

촛불을 켜 놓고 실성한 사람 마냥 마치 염불을 외우는 스님처럼 중얼거리며 책을 읽다 보면 얼마나 깊은 밤인지 가늠도 되지 않고, 순간 예고도 없이 창호지를 때리는 왕 나방으로 혼비백산도 해보고, 느닷없이 덮치는 장마 비에 야외 화장실에 있다 몽땅 젖기도 하였다. 이왕에 맡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산사의 생활에 적응이 될 듯한 꼭 열이틀이 지난 날,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주지스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날부터 만 하루 동안 스님과 나는 깊은 산사에서 단둘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자연적인 상황에 부딪혀 젊은 나이에 납득이 안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주지 스님과 월출산에서 보냈던 하루 밤과 거리낌 없이 토로 하였던 문답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은연중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스님이 내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기도 하고 앞날에 대한 몇 가지 예측도 하였지만 이후 거의 대부분이 맞아 들어갔다. 스님을 통하여 접한 나머지 사연들은 현출되지 못한 석불인 것처럼 그냥 내 가슴에 묻어두기로 하였다.

나에게는 너무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이라 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사코 말리는 것을 월출산에서 그대로 하산을 하였다. 

군에서 제대 한 후 스님을 다시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소문해보니 월출산 용암사는 다른 암자들과 함께 강제 철거 되었으며, 나주 시내 어느 골목에서 평상복을 입으신 스님을 뵌 뒤로 이후 영영 만날 수가 없었다. 스님이나 나 모두 월출산에서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이었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고흥 부근에서 또다시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스님과 헤어지던 순간의 기억이 엊그제처럼 선명하고, 아쉬웠던 마음은 평생을 통하여 이어지며 어언 수십 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버렸지만, 우리들 재회의 순간이 언제일지 모르는 미완의 인연들은 하늘에 흐르는 구름처럼 덧없이 가고, 단풍잎 새 잠시 머무르거나 때로는 바람으로 스칠지라도, 어딘지도 모르는 채 진정 멈추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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