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 시대, 마오쩌둥의 ‘국민민주독재론’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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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치 시대, 마오쩌둥의 ‘국민민주독재론’을 논하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7.0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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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정거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대한민국은 2016년 촛불혁명을 통해 2017년 정권을 교체했다. 혁명은 혁명이지만 상대를 쓸어버릴 수 없는 상대와 공존하는 혁명이었다. 촛불민심의 주된 소망과 요구는 적폐청산이었다. 그런데 사실 애매하고 뭔가 추상적으로 인식되는 적폐는 정말 청산될 수 있을까? 촛불로 대선에서 승리한 야당후보, 문재인 대통령은 ‘협치’를 선언하며 야당과의 공존을 역설하고 있다. 직권상정을 제한하는 국회선진화법도 그렇지만 여소야대 국회에서 전략적으로도 이런 방법 외에는 사실상 없다. 협치를 국민에게 선포하고 국민적 여론을 통해 야당을 견인하려는 전략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일한 방도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쉽지 않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볼 것도 없이 지금 정치권의 모습은 협치가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적어도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수구정당에게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야당은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권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권력을 누려왔던 이들은 권력의 맛과 향수를 뿌리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상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약점과 허점을 잡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문재인의 성공은 보수세력의 재앙
    
이제 국민들은 정권교체 2개월을 넘기면서 “과연 여야가 상호 협조하는 정치 또는 통치를 통해 이 나라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가해자 도둑과 피해자 집주인이 있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회의론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 하면 공존은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 죄값을 치러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반성과 처벌없이 피해자의 선의로만 일방적인 화해가 제시됐을 때 부작용과 반동을 우리국민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통해 이미 경험했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가 그것이다. 상대를 그냥 선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하려는 불안한 동거가 더 어려운 이유이다. 

1840년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 중국 대륙에서 발발했다. 그 당시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를 사들이면서 심각한 무역역조 현상을 겪고 있었다. 인류역사가 그래 왔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위기 등 수세에 몰리면 전쟁을 통해 해소해 왔었다. 영국정부는 중국과 전쟁을 택했다. 영국은 점령하고 있던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내다 팔면서 당시 국제결제 화폐로 통용되던 은을 보충하려고 했다. 영국의 아편판매로 중국에는 300만 명이 넘은 인민들이 아편중독자가 되었다. 쇠망해 가는 청 조정은 결국 아편을 몰수해 소각시키고 아편 중개상인들까지 쫓아냈다.

영국입장에서는 드디어 때가 왔다. 영국은 이를 핑계로 전쟁을 감행했다. 결과는 영국의 완승이었다. 상하이와 영파 등 주요 5개 항구가 난징조약으로 강제 개항됐다. 중국은 또 전쟁배상금을 영국에 지불해야 했다. 상하이 등지에는 제국들이 밀고 들어와 자기네 땅 조계지를 만들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세계의 중심이자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해 왔던 공자의 나라 치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이 역사에서 배운 교훈

1894년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땅에 진주한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충돌했다. 청일전쟁이었다.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만주 땅을 내줘야 했고 청나라 조정은 3년 치 재정수입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을 일본에 줘야 했다. 중국인들은 섬나라 오랑캐 일본에 패배한 것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양무운동이니 중체서용이니 하며 망해가는 대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강운동을 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일본이 패망하고 세계 2차 대전이 종식된 1945년 8월 말,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충칭(중경)에서 만나 새로 건국할 국가에 대해 회담을 시작할 때 모습.

1911년 쑨원이 중심이 돼 무능하고 부패한 만주족의 청나라 왕조를 붕괴시켰다. 신해혁명이었다. 또 러시아에서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뭔가 이루어질 듯 하는 분위기였다. 1921년 7월 프랑스의 조계지인 상하이의 후미진 건물에 10여명의 중국인들이 몰래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학교 교사나 대학도서관 사서가 어울리는 이가 있었다. 마오쩌둥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은 아니었다. 오늘의 G2국가로 만든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전 세계는 대공황에 빠졌고 자본주의 체제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대청제국에서 이름만 바뀐 중화민국은 이미 기울어져 가는 고목나무와 같았다.

1937년 일본은 중국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전면전을 시작했다. 8년간의 걸친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홍군은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해 침략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세계2차 대전은 종식되고 중국 대륙에서 일본은 물러갔다. 중국은 8년 간의 항일전쟁으로 3,500만 명이 희생됐는데, 그 중 군인은 500만 명이 채 안됐고 나머지는 모두 불쌍한 인민들이었다. 더구나 2억 명의 인민들은 유랑인으로 전락했다. 전쟁 비용을 포함한 재산손실은 5,600억 달러가 넘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마오, 인민-민주 반동에게는 독재

이제 과제는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1945년 8월 28일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회담을 위해 은거지 옌안을 떠나 비행기로 충칭(中京)에 도착했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담판이 시작됐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시기인 그때, 전 세계의 눈이 중국으로 집중됐다. 2개월 가까이 계속된 두 지도자 간의 담판으로 내전을 피하고 평화로운 나라건설을 골자로 한 연합정부를 구성하겠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8개월 뒤 장제스의 국민당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내전을 시작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병력만 430만 명에 중국 대륙의 70% 넘는 지역은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미국과 영국이 보내 준 300대가 넘는 전투기, 폭격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반대로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홍군)는 127만 명에 불과했다. 쉽게 승부가 날 것으로 예상되는 국공내전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군인 출신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밀렸다. 내전이 발발한 지 4년이 되던 1949년 4월 23일 국민당의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南京)이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접수됐다.

이제 1840년 아편전쟁에서부터 시작해 근 100년 동안 계속된 전쟁과 내전이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새로운 수도가 될 베이징(北京)에 나타났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서 보듯 두목은 승리가 확실해야 여유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다.

1949년 7월 마오쩌둥은 ‘국민(인민)민주독재를 논한다‘라는 제목의 역사적인 논문을 발표한다. 이를 테면 재조산하(再造山河)였다. 새로 만들어질 나라의 성격에 대해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그는 인민을 노동자, 농민, 소자본가, 민족자본가로 정리했다. 반동세력에 대해도 규정했는데, 제국주의 앞잡이와 지주계급, 관료자본가와 그들을 대표하는 국민당 세력과 앞잡이를 반동파로 정리했다. 그러면서 인민은 내부적으로 민주제도를 실행하고 반동파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행하여 그들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다고 명시했다.

결국 국민당군은 인민해방군에 패배했고 군인 출신인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났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건국행사가 열렸다.  

마오쩌둥의 역사적인 논문은 중국헌법에 초안으로 반영되었다. 이웃나라 중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혁명과 개혁이 다른 점, 그리고 오늘 현재 대한민국에서 협치는 어떤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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