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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주년···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56월 10일 목청련, 종교단체 목포대학생 등 1만5천명 운집
류용철  |  ryuchul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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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1  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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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0일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하당신도심 평화광장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1985년 2.12 총선에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승리 한 이후 정치권은 개헌 열풍이 분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현판식을 비롯한 전국적인 개헌 추진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와중에 1987년 1월 12일 서울대의 박종철이 안기부 대공 분실에서 고문에 의해 사망 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단순 쇼크사로 발표하고 기만적인 정권과 언론에 온 국민이 분노했다.

목청련 역시 ‘2.7 박종철 열사 추도회’ 등에 참여하여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온 국민의 개헌 요구와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상규면에 대한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4.13 호헌 조치를 감행한다.

이에 목청련도 ‘호헌철폐’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국민대회’를 목포지역 애국 청년학생 시민들과 함께 전개하였으며 각종 성명서 등의 대규모 선전 활동을 벌인다.

또한 “6.10 박종철군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 철폐국민 대희(이하 6.10 대희)‘를 목포에서 준비한다. 민정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인 6월 10일에 맞춰 독재에 대한 항쟁이 목포에서도 시작된다.

6.10 대회의 주최 측인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목포민주회복국민회의, 목포대총학생회, 목포 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각 사회 종교 단체의 목사, 재야인사들이 경찰에 의해 9일부터 가택 연금된다. 6.10 대회 당일 오후 3 시경에는 전경과 사복을 포함한 일반 경찰, 그리고 인근 신안지역에서 동원된 경찰 및 행정 공무원들이 대회장 주변과 관공서 등에 집중 배치된다.

대회장인 역전광장은 경찰에 의해 이미 봉쇄되었다. 목포대생과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500 여명의 시위대가 모이기 시작하자, 경찰은 즉각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는데 무방비의 시민들에게도 사과탄을 던져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하면서 경찰의 폭력에 항거하기 시작했으며, 20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자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민회관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4천만을 우롱하는 전두환은 퇴진”, “미일외세 물리치고 민족 민주 이룩하자”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들은 이동해 갔다.

이때 목청련 간부들은 주최 측으로서 구호를 주도했다고 한다. 또한 목포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학생들을 시가지 여러 방면으로 인솔하면서 시위가 조직적으로 짜일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노력했다. 6시 20분경 1천 500여명의 시위대는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회관(옛 중앙공설시장) 점점 모여 들었다.

경찰들의 최루탄 난사로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목청련 회원들은 시민들이 흩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아 내며 산발적인 시위를 주도해 갔다. 이 날은 연동교회와 성당에서 연합예배와 미사가 있기로 했다.

시민과 청년, 학생들은 연동교회, 성당 쪽으로 점점 이동해 갔다. 교회와 성당에서 각각 1 천여 명씩 모여 ‘나라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시위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10시경 연합 예배 후 시내 쪽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신부, 수녀들을 중심으로 2호 광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막아선 경찰들은 평화집회도 최루탄과, 전경의 곤봉, 물대포로 막아섰다. 시민들도 지지 않고 시위를 이어 나간다. 송홍철 신부가 선두로 행진을 시작하며 ‘선구자’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부르며 십자가를 앞세우고 3호광장 방향으로 행진했다.

어느 새 시위대는 5천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3호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1만 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자정 즈음 가톨릭 회관 앞에서 시위대는 ‘개헌쟁취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자진 해산했다. 이날 목포에서는 목포역전 파출소, 연동파출소 등 네 곳의 파출소가 시위대의 투석에 유리창이 파괴되었고 26명이 연행되었다.

6월 10일 이후부터 19일까지는 호남지역에서는 대규모적인 집회가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 소재의 대학들 각 대학의 내부의 문제로 선도적으로 나설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목포에서도 6.10 대회 이후 17일에서야 목포 대학생들의 가두 투쟁이 있었다.

18일에는 역전 광장이 봉쇄되는 가운데 시민 회관(옛 중앙공설시장) 앞에서 ‘최루탄 추방 대회’가 열렸다.

19일에는 1차 목포시민궐기대회가 열린다. 목포대 반반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 인근 지역 인 무안지역에서는 기청, 가청을 중심으로 양파값 폭락에 항의하는 양파투척 투쟁이 벌어진다.
19일 1차 목포시민궐기대회로 시위가 가열되자 시내 고등학교는 단축 수업에 돌입한다.

20일 시위는 5시경 단축수업으로 일찍 하교한 500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집결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목청련 의장이었던 이현희는 500여명의 고등학생 대오를 3개 대로 조직한다. 대 학생들이 아직 시내로 진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수의 목청련 인원으로 500 여명의 고등학생들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조치였다. 3개 대로 조직된 고등학생들은 중앙시장 등 주요 거점에서 산발적으로 목청련 회원들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대학생들의 시내 진출로 시민회관 앞에 2000여명으로 시위대의 수가 늘어날 때까지 효율적인 시위를 전개한다.

밤 11경 목포 대학교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제 2차 목포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격렬한 시위는 계속되었다.

21일부터 목포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남교로를 가득매운 3000 여명의 시위대가 역전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격렬하게 저지하기 시작했고 평화 집회에 물리력으로 대응하는 경찰에 분통을 터트리며 시민들은 ‘시민 무장’을 주장한다. 시민들은 목청련의 주도로 26일 평화대행진을 전후해서 화염병, 각목 등으로 무장을 갖춘다.

26일의 시위는 목포시내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다. 2호 광장에서는 재야인사들이, 중앙교회에서는 개신교 목사들이, 시민회관에서는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6시경에 시위대는 2만 여명이 넘어 섰다. 약 300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목포역 인근 5 곳에 각 거리마다 선두에서 경찰의 최루탄과 물대포의 저지선을 뚫고 목포역 광장으로 진출 하 였고 마침내 6시 30분경 6.10 대회 이후 처음으로 시위대가 목포역 광장 진입에 성공하였다.

역전 광장에 시위대의 진입이 이루어지자 경찰은 시위대의 후미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본대와 후미를 끊고자 했다.

시위대는 격분했고 경찰을 저지하기 위해 최소로 화염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염병 투척이 시작되자 지금껏 당하기만 했던 시위대와 시민들은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박수를 치며 계속하라고 격리했다.
이날의 시위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무안에서는 기농과 가농을 중심으로 약 300 여명의 시위대가 버스 터미널에서 시위를 벌이고 목포로 합류하였다. 27~28일 시위는 전날보다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는 양상을 띠었다.

대성동 파출소가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었으며 이날에만 약 30여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다.

목청련은 29일에는 더욱 격렬해질 것을 각오하며 목포세무서를 주요 공격목표로 정하고 약 600 여개의 화염병을 준비했으나 이른바 6.29 선언으로 무산되었다.

87년 6.29 선언 이후 목청련은 6월 9일 연세대학교 6.10 대회 출정식 도중 전경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병상 투쟁을 하던 중 사망 한 ‘이한열 열사’의 뜻을 기리는 분향소를 거리에 설치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규탄하면서 6.29의 허구성을 알리는데 회원 모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야 노숙한다.

이 시기 목청련은 주요 선전 작업과 유인물의 제작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현 극단 갯돌의 이방수 대표는 이 시기 목포 지역에 걸린 모든 플래 카드를 항쟁 내내 밤을 세워가면서 제작했다고 한다. 이방수의 손 글씨 플래카드의 글씨체를 ‘타도체’라고 부를 정도였다.

또한 경찰의 격렬하고 야만적인 진압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화염병을 전담해서 제작했는데 회원들이 화염병 제작에 있어 처음에는 서툴더니 항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아주 능숙해 졌다고 한다.
정리=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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