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도시 목포, 왜 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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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도시 목포, 왜 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 인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7.1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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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포 희망 만들기 현실 진단과 처방 -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장 강봉룡

목포의 쇠퇴는 역설적이게도 해방과 더불어 찾아왔다. 해방공간(1945~1948)의 과도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대한민국) 수립을 공포하자 북한에서도 9월 9일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급기야 남북이 분단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일본의 패전, 한반도의 분단, 중국의 공산화로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쳤고,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목포의 운명도 이에 휩쓸렸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도해의 관문으로서, 해륙 중계도시로서 급성장했던 목포는 해방 이후에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목포를 통해 海陸 양면으로 통하던 중국은 ‘죽의 장막’으로 가려 차단되었고, 일본과 중국을 이어주던 서남해의 바다는 졸지에 국제적 고립 공간으로 전락하였으며, 다도해 에너지의 퇴락도 뒤를 이었다. 이와 함께 목포 역시 국제성을 상실하고 폐쇄적인 ‘동네 골목대장’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목포는 피난민의 급증으로 한 때 혼란 속의 성세(?)를 누리기도 하였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1960년대에 박정희정권이 출범하여 ‘조국근대화’니 ‘수출입국’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워 산업화를 본격 추진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동남권에 집중되면서 목포를 비켜갔다.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는 오히려 ‘경상도 정권에 의한 호남 차별’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는 결과를 가져와, 목포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는 현실적 박탈감과 심리적 피해의식이라는 이중의 고통과 굴레에 시달려야 했다.

목포의 박탈감과 피해의식은 이후 격동의 정치 과정을 거치면서 심각한 지역감정으로 고착화되었고, 지역감정은 역설적이게도 이후 목포가 박정희정권에 저항하는 야권 정치의 상징 도시로 떠오르는 에너지로 작용했다. 그때 목포 정치의 중심에 섬 출신의 김대중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김대중은 서남해의 하의도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키워준 곳은 목포였다.1) 그가 20대에 사업가로 성공한 곳도 목포였고, 30대에 정치에 입문한 곳도 목포를 기반으로 했다. 그가 40대에 박정희정권에 맞서는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도, 1960년대 이후에 목포사회에 퍼져있는 박탈감과 피해의식에서 분출되던 저항의 에너지가 작용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후 1970~80년대에 목포는 야권의 성지가 되었고, 정권을 잡는 것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진단)으로 김대중과 함께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 일체화되었다. 그러다 1997년 마침내 김대중은 70대의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목포는 1960년대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짊어져 온 피해의식의 설움과 恨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개운하지 않았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믿었던 것은 착각이었다. 목포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기왕의 체험과 절망은 허탈과 냉소로 변해갔다.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다.

새로운 진단이 필요하다. 먼저 1960년대 산업화가 동남권에 집중된 현상을 ‘경상도 정권에 의한 호남 차별’이라 규정한 프레임을 재고하는 것으로부터 진단의 첫 단추를 꿸 필요가 있다. 이 프레임으로부터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생겼고 지역감정이 심화되었으며, 이를 뒤집어 업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정치 올인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과연 1960년대 산업화의 동남권 집중 현상이 전적으로 ‘경상도 정권에 의한 호남 차별’의 악의에서 말미암은 것인가? 전혀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좀 더 냉철하게 따져보면 다르게 이해할 부분도 있다. 즉 당시 목포와 서남해의 다도해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기에, 수출을 전제로 하는 산업시설은 결국 동남해와 태평양을 통해 일본과 미국으로 열려 있던 동남권에 집중될 수 없었겠다는 사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간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목포의 체념과 절망의 원인을 정치적 피해의식에서만 찾다보니 정작 문제 해결의 深源을 진지하게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심원에 대한 성찰이란 목포의 정체성에 대한 진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답을 통해서 수렴해야 할 어떤 것이다. 우리는 목포 인문도시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 질문과 답을 되풀이하고 토론을 거듭하였다. 목포의 독특한 지리환경과 역사경험도 내밀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도해의 모항 목포’를 목포 정체성의 화두로 삼아 현실 진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도해의 모항 목포’를 목포 정체성의 화두 삼아 현실에 적용하여 진단하는 과정에서, 목포시와 시민들이 서남해 다도해에 대하여 의외로 관심이 적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목포시민들의 대다수가 섬 출신이거나  섬 출신자의 후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예상 밖의 결과아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인문도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내가 왜 그간 섬(다도해)에 대하여 무심해 왔던가 알 수 없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러한 반응은 정치적 피해의식에 얽매여 목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성찰한 여유 없이 무심히 살아왔음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최고의 다도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포시와 목포시민들은 이를 외면했다. 목포와 서남권 다도해가 일체였음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목포시라는 좁디좁은 행정적 울타리에 갇혀 정치적 피해의식에만 집착하였다. 여기서 보다 냉철한 현실 진단을 위해서는 스스로 경계지워 가두어온 목포시의 실태를 엄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포시는 면적이 49㎢에 불과하여 비수도권 기초지자체 중에서 가장 작다.2) 인구는 약 24만으로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공간에 거주하다 보니 인구밀도는 수도권과 광역시를 제외한 일반 기초지자체 중에서 가장 높다. 경제규모와 유동인구가 과소하고 면적조차 좁다란 경계 안에서 적지 않은 인구가 오랫동안 부대끼며 살다보니, 목포시민들은 밖의 큰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내부의 작은 것에 매달려 집착하는 경향이 생겨 버렸다. 경계 안에 갇힌 폐쇠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듯 체념과 절망, 폐쇄의 분위기가 오랫동안 목포를 억눌러 왔다고 한다면, 이를 극복하여 ‘희망 만들기’로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장 강봉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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