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주년···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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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주년···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6
  • 류용철
  • 승인 2017.07.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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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민주화 투쟁에서 청년 노동자 활동 기반을 다지다
▲ 제13대 대통령 선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들이 오늘(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선거연수원에서 제13대 대통령선거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을 개함하고 있다.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6월 항쟁의 과정에서 목청련을 만난 목포 지역 청년들이 항쟁 이후 모여 들기 시작한다.

운전기사, 학생, 부두 노동자 둥 다양한 청년들이 회원 활동을 시작한다, 1987년 8월에는 17명이 참여
한 가운데 하계수련대회를 월출산에서 개최한다.

이 수련대회를 계기로 목청련은 새로운 조직의 방향성을 설정한다.

즉 목청련이 진정으로 많은 목포 지역의 청년 대중들과 함께 하는 조직인가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소수의 운동가 중심의 활동에서 빨리 벗어나고 목포지역의 모든 일하는 청년들의 이해와 요구가 수렴되는 명실상부 한 청년대중 조직으로 전환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일하는 청년 대중을 계급 계층별로 묶어 세워야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특히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은 목포지역에서도 그 불길을 당겼으며 목청련은 노동자 투쟁 특집호 ‘목포의 소리 11, 12호’를 발행하면서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지원 활동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뜻있는 노동청년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게 된다. 투쟁의 과정에서 최초의 반인 ‘노동반’이 만들어 진다. 노동에서는 노동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고 실천 활동을 벌여 나갔다. 9월에는 창립 2주년 기념행사로 회원 모두가 나서 일일 찻집을 운영하고 ‘문익환 목사 초청 강연회’를 열게 된다.

10월 15일에는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출범하게 되는데 실무역량을 대부분 목청련의 구성원들이었다. 국본의 출범과 함께 목청련은 대통령 선거투쟁에 나선다. ‘전두환 노태우에게 패배를 민증에게 승리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주정부 쟁취를위한 공정선거 감시단 활동을 한다. 노동반의 창립 이후 여성반, 직장반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구로구청 투표함 부정선거가 제기되자 목포에서도 12월 17일부터 21일까지 부정선거무효화투쟁을 전개한다. 5일간의 부정선거무효화투쟁은 서울, 광주에 비교해 봐도 전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 된 투쟁이었다.

부정 선거 무효화 투쟁은 처음의 군부 파쇼 재집권 반대 집회라는 의미를 넘어 목포 시민들의 김대중에 대한 지지확인투쟁으로 전개된다.

이는 김대중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목포지역에 노태우의 당선이 주는 시민들의 상대적인 허탈감의 표출이었다.

이 과정에시 국본의 사무국장을 맞고 있던 목청련 의장 이현희가 구속되고, 국본의 조직국 장 윤소하, 선전국장 강덕수 등은 피신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일하는 청년대중 조직의 기치를 내걸고 조직 활동의 변신을 모색하면서 각반은 자체적인 활동과 사업을 벌이며 성장해 간다. 노동반은 운수노동자, 생산직 노동자를 주축으로 노동법 공부, 노동 문제 연구, 노동청년강좌 등을 실시하고 직장반은 민주주의에 관심과 참여를 표명하는 양심적인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을 전개한다. 여성반 또한 여성 문제 연구를 중점으로 토론활동을 준비한다.

88년 2월 6일에는 20여명의 회원이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이하 전청련) 동계 수련회에 참석하여 목포, 광주, 순천, 여수, 송정, 광산, 나주, 고흥, 보성지역위원회 청년들과 단결 투쟁을 결의한다.

3월 6일에는 88년 상반기 정기총회를 열고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에서 목포민주주의청년연합(이하 목청련)으로 개칭한다. 이현희 의장이 재선되었고, 주직구조를 운영위원회, 중앙위원회를 결합시킨 형태로 바꾸어 새로운 활동을 준비한다.

4월 5일 학생, 청년들이 모여 학생반을 창립하고 청년 학도로서의 올바른 삶에 대해 함께 토론하며 실천 활동을 벌인다.

4월 20일 총선을 맞아 목청련은 민정당 낙선투쟁을 전개하면서 같은 기간에 발생했던 호남고무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의 지원활동을 강력히 벌인다.

5월 18일에는 목포 광주 민중 항쟁 기념행사를 목포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역전에 분향소를 설치, 운영하면서 전 회원이 철야로 나선다.

88년 6월 10일 영충상회 4층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6 10, 8 15 남북학생회담 등 조국통일운동에 나서게 되고 목포지역 제 민주 단체와 연대하여 투쟁을 강화한다.

8월 13일부터 8월 15일까지 2박 3일간 지리산에서 하계 수련회를 40여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통일의 선봉, 청년’이라는 주제로 수련 활동을 진행한다.

7월에는 태원 농장 농민 생존권 지원의 일환으로 이장용 규탄 선전 및 농성장 방문, 태원 농장 방문, 현지 조사 활동을 벌인다.

8월에는 8월 2일부터 7일까지 목포지역 민주 단체들과 공동으로 북한 바로 알기 통일 사진 전시회, 비디오 상영,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여 연 20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 하였다.

이어 전두환. 이순자 구속 촉구대회 등을 진행한다.

또한 사학 비리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웠던 신명여상 교사, 학생들과 연대 지원 투쟁을 하면서 전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88년 하반기에 이르러 조직을 정비하고 대내 활동 강화에 역점을 두면서 하반기 사업은 각반 활성화 및 확대 강화를 꾀했으나 대체적으로 활동이 부진했고 지역 내 연대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목포사회운동단체실무자협의회’를 구성한다.

89년 2월에는 전청련 동계 수련회에 20여명의 회원이 참여, 단결의 기운을 높이고 많은 일꾼들도 영입하면서 ‘목포의 소리’도 4면에서 8면으로 증면하면서 선전 활동을 강화한다.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2박 3일 동안 한산촌 교육센터에서 상반기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승인하였고 윤소하를 의장으로 선출한다.

4월 11일부터 5월 9일까지 ‘청년학교’ 1기를 개설하여 목포지역 칭년들의 정치적 각성을 도모하고 일하는 청년들의 권리 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한 교육공간으로서 40여명의 학생들이 배출된다. 졸업생들은 배운 것을 토대로 실천 활동을 위한 자치반을 구성하여 학습 등 더욱 발전된 자기단련에 온 힘을 쏟았다. 청년학교 2기를 준비하는 과정에 ‘사설 강습소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한다.

5월에 들어서는 5 18 투쟁본부 사업에 열중하면서 한편으로 이철규 열사 진상 규명 투쟁을 전개한다.
또한 목포지역 노점상 생존권 지원 투쟁을 전개하며 이를 통해 민중생존권 탄압을 폭로, 규탄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기에 이른다.

4월 26일에는 취미별 모임인 기타반이 창립되어 기타와 노래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식을 심어가는 데 힘쓰고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증도리 목대수련원에서 ‘청년이서야 나라가 산다’라는 주제로 수련 활동을 한다.
정리=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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