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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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7
  • 류용철
  • 승인 2017.07.2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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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청련’ 목포지부로 전국 민주주의 조직 중추적 역할

[목포시민신문=정리/유용철기자]목청련의 조직구성은 1985년 8월 결성시 조직 구성을 기본으로 한다.

단체의 사업 및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대표로써 의장과 의장을 보좌하는 부의장을 두었으며, 원로 인사들을 중심으로 고문, 지도위원, 자문위원을 두었다. 여기에 각반의 대표들을 포함시켜 상설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사업집행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운영위원회를 대표하여 사업과 활동을 집행하는 운영위원장을 두었다. 또한 사업과 활동의 조직화와 전 문화를 꾀하기 위해 총
무, 조직, 교육, 홍보, 문화체육 등 각부와 국을 조직 하였다.

목청련은 결성 초기에는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6년 11월 18일 전남 민주 청년 운동 협의회와 함께 ‘전남 민주주의 청년 연합(이하 전청련)’을 구성하고 광주지역위원회와 목포지역위원회로 활동을 하게 된다.

전청련의 지역위원회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목청련은 전국적인 연대체로써 민주 통일 민중 운동연합(이하 민통련)에 가입하여 민주화와 민족통일 운동에 매진 한다.

이후 목청련은 1988년 3월 6일 상반기 정기총회를 거치며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에서 목포민주주의 청년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전청련의 광주, 순천, 여수, 송정, 광산, 나주, 고흥, 보성 등의 지역위원회와 함께 목포지역위원회 활동을 새롭게 시작하여, 기존의 중앙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하나의 조직구조로 결합하여 사무국을 신설한다.

조직의 근간이 되는 운동가의 합류 형태를 보면 결성 초기에는 70년대 중후반의 서울, 광주 지역의 대학을 다녔던 목포 지역 출신의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 주를 이룬다. 양지문, 이현희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80년 5월 민주화 항쟁 때부터 활동을 지속해 오며 목청련 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결성 이후에는 목포대학 등 학생운동권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며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에게 추천을 받아 지역 학생 운동권 출신의 인물들을 주로 영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윤소하는 당시 목포 대학교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김재홍에게 목청련의 운동가들을 소개받고 목청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목청련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며 매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운동가들 거의 다수가 학생 운동권 출신이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고자 스스로 목청련을 찾아오는 운동가들도 있었다. 강상철의 경우 목청련으로 민주주의 국민회의보를 찾아 초대 운영위원장 곽재구를 만나 이현희와 학습하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으며, 박웅기, 서병수, 정병욱, 손철주, 손민한 등과 같은 경우는 노동자로서 활동을 하다 결합하게 된다.

주요 간부들의 출신을 살펴보아도 초기에는 의장, 운영위원장, 사무국장 등 주요 간부들이 학생 운동권 출신의 운동가들로 이루어졌지만 이후 노동자 출신의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증가하면서 조직의 간부를 맡는 사례도 증가한다. 손철주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손철주는 윤소하가 의장 시절 부의장을 수행했으며, 이후 윤소하에 이어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정리=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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