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恥天命(치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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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恥天命(치천명)
  • 류용철
  • 승인 2017.12.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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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철 본사 대표이사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조지오웰의 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마지막 달력이 팔락이며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의 마지막 달 어느 하루가 기억의 편린으로 사라져 간다.

어제 내린 눈으로 순백의 세상으로 바뀐 밖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생각한들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이 부질 없지만 나를 돌아본다.

지천명에 와 닿았다. 새로울 건 없다. 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 순진하게도 진짜 오십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줄 알았다. 막상 그 나이 되고 보니 하늘의 뜻은커녕 가까운 친구나 동료의 생각도 모르고 있다. 심지어는 성인이 다 된 자식들의 생각은 물론, 함께 살 맞대며 사는 부인의 머릿속도 알 수 없다.

나만 그런 가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늘의 뜻도 알고 세상 이치도 깨달아 반쯤 도가 통해서 사는데 나만 나이 헛 먹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혼자 고민하다가 가까운 지인과 얘기해보니 대부분 나와 다를 게 없다. 식당이나 찻집에서 체육공원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얘기해 봐도 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모두가 하늘의 뜻은커녕 가끔씩 제 머릿속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십대에서 삼십대까지는 세상 보는 눈이 순진할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취직하고 인생 계획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설렘과 그와 함께 미래를 설계하며, 그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의심 없는 믿음이 존재하는 시기다.

그 시기에 누군가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편 가르고 배척하고 미워한다면 젊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쓴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애늙은이거나 지독한 피해망상자일 뿐. 젊다는 것의 특성은 여럿 있겠지만, 뭐든 의심 없이 열정으로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투자를 하는 것도 누군가의 뒷담화를 들어주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까지.

그러나 불혹(不惑)이라는 사십 대에 접어들면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삼십 대를 지나 사십 대에 들면 생활 걱정, 미래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불신들이 상처 위에 덧나는 딱지처럼 더덕더덕 마음을 덮기 시작한다. 묵직한 배신, 분노, 증오, 환멸 같은 것들로 수많은 상처를 입는 것도 주로 사십 대부터다. 내 느낌에는 아마도 그 즈음이 사람들에게서 순진함이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 극대화에 전념하며, 상대의 상처에는 둔감해지는 나이가 아닌가 싶다.

사십 대엔 나 스스로도 그런 일들은 웬만큼 겪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내 가까운 사람들이 선량한 관계와 단단한 믿음으로부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망가지는 것도 수없이 보았다. 그런 것들에 시달리며 지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순수는 가출한 지 오래고 의심과 눈치만 남는다. 그렇게 단련된 의심과 눈치도 당할 때는 또 맥없이 당하는 게 현실이다. 불혹? 천만의 말씀, 사십 대를 미혹과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게 어디 나뿐일까.

해가 바뀌면 만으로 오십이다.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늘의 뜻을 알기는커녕 의심만 늘어간다.

10년 후면 이순(耳順)이라 무엇을 들어도 다 이해하는 나이가 된다는데, 지금 봐선 그것도 가망 없겠다. 요사이는 하늘마저 살짝 의심이 간다. 나이 들수록 의연해져야 할 텐데 자꾸 망가져 가는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이 창피해서 또 하늘 눈치만 보고 사는 것 같다.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거나 하늘의 뜻을 못 미더워 의심하거나 하늘의 뜻에 못 닿아 부끄러워하며 사는 걸 생각하면 나이 헛먹었나 보다. 지천명(知天命)은 고사하고 치천명(恥天命)이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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