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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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 류용철
  • 승인 2018.01.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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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해안로 루트를 따라서~백년 목포 근대 역사 따라 걷는 항구 목포를 맡는다
▲ 1930년대 목포시 본정통 거리 모습

[목포시민신문=류용철기자] 두 번째 연재로 목포의 심장을 걷는 ‘목포 해안로’루트를 구상해 본다.
△오거리(吾居里)에서 시작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해운사 건문 △옛)조선은행(현 목포문화원 건물) △옛)화신백화점 △목포 백반의 거리 △목포 민주화 산실 고 안철 장로 약국 △갑자옥 모자점 △옛 수문토 거리 △민어의 거리 △옛 힛빠리 골목(항동시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유년시절 집터 △만호진 △여객선터미널 △금화동 유곽 △ 서산동 조금새끼 골목 △할매집 △보리마당까지 오르는 길이다.
이번 ‘목포 해안로’ 골목길 연재는 이주 첫 회를 시작으로 총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목포에서 길은 오거리에서 시작한다.

불 빛 하나도 길이 되는 어둠속에서 등대가 수천 수만갈래의 물길을 열듯이 항구 목포에서 오거리는 다섯갈래 길이 아닌 수천 수만갈래 사람의 길을 만들었다. 수 십 년 동안 이곳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오고갔다. 그리고 절망적 시대에 울부짖는 신파를 노래하고 젊음과 사랑, 욕망으로 매일 도시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 쌀 등 수탈 항으로 성장한 목포는 저마다 성공을 꿈꾸며 도시로 몰려든 조선인들은 일본인 거류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다섯 갈래 길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하당신도심이 조성된 2000년 초까지 오거리 일대는 목포의 중심 상업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는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이곳은 목포 도시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해운업 사무소, 다방, 양장점, 극장, 음식점 등이 앞 다투어 들어섰다. 이곳으로 돈이 몰려들었다. 이곳엔 호남 최초 일간지 목포일보가 자리했다. 목포일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억과 깊다. 김 전 대통령이 젊은 시절 3대 사장을 엮임했다. 목포일보는 1948년 경영난으로 폐간됐다. 이후 지역에는 목포일보의 맥을 잇기 위해 영해일보가 창간되었지만 채 1년도 발행하지 못하고 폐간됐다. 일제 패망과 해방,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목포 경제가 쇠락했기 때문이다. 면화, 쌀, 소금 등을 수탈해가는 항구로써 역할이 줄면서 목포 경제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추락했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광주에서 전남매일이 창간되면서 호남의 언론의 명맥을 유지했다.

1930년대 김 전 대통령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게 된다. 영암 출신 낭산 김준연의 적극적인 권유로 입당했다. 이것이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일생에 적지 않은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낭산은 일본 동경제국대학 유학을 다녀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를 하고 있었다. 낭산은 항만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동향인 조극환과 함께 목포지역 공산당 활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낭산은 해방 이후 영암에서 한민당으로 제헌의원에 당선된다. 이곳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포상업 고등학교 졸업하고 세운 해운사가 있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해운사 일을 하면서 한국전쟁을 맞는다. 또,김 전 대통령은 차영화 여사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된다. 현재 이곳은 술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해운회사를 운영하면서 해방과 함께 찾아온 격변과 혼돈의 시대를 맞는다. 회사일로 서울에 올라갔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30여일을 걸어서 목포에 도착했다. 그러나 ‘빨갱이’란 밀고로 김 전 대통령은 목포교도소에 수감되게 된다. 이곳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동안 숨어 지내게 된다.』
<김대중 자서전 내용 중에서>

▲옛 화신백화점 건물

옛) 호남은행 자리 섬성 현대그룹의 연을 맺다

지금 목포문화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호남은행 목포지점이 있다. 순수 민족자본 은행이었던 호남은행은 1920년 10월 2일에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은행이다. 호남부호 현준호, 김상섭, 김병로 등이 당시 돈 150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하였으며 본점은 광주에 두었다. 1933년 7월에는 동래은행을 흡수, 합병하게 됨으로써 영업지역을 경상남도지역으로까지 확대, 동래, 거창, 영광, 담양 등지에까지 지점을 설치했다. 일제가 1923년 신은행법을 발포하고 민족계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인 자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식민지금융정책을 강화한다. 독자운영을 고수하던 호남은행은 일제의 간섭으로 1942년 4월 30일에 합병 당하게 된다.

은행의 설립은 1920년이나, 본 건물은 1929년 11월에 건립되었고, 건물의 형태는 단순한 직사각형 2층이며, 외부는 붉은색 타일로 마감하였다. 순수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삼성 미술관 리움 관장)가 당시 호남은행이었던 이곳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호남은행을 설립했던 영암 거부 현준호가(家) 사람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그룹의 안방 주인인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이곳 호남은행에서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 이채롭게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옛)화신백화점 목포연쇄점이 나온다. 현재 건물 외벽 마감재가 떨어져 허름한 모습으로 서있지만 건물의 이색적인 형태와 규모면을 볼 때 과거 위풍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화신백화점은 1931년 서울에 설립됐다. 화신백화점은 개항장으로 도시가 진행된 부산, 대구, 원산, 목포, 군산, 광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 연쇄점을 설립했다. 백화점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해 연쇄점화 하는 새로운 운영방식을 도입하면서 목포에도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백화점이 들어설 정도로 소비층이 두텁게 존재할 정도로 목포의 경제적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조성된 이곳은 70~80년대 산업화에 따른 개발의 광풍을 벗어난 탓인지 20~30년대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모습을 보인다.

70년대 조국 근대화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산업화를 주도했던 유신정권은 호남의 산업화를 철저히 외면했다. 호남 제일의 도시 목포는 해방과 함께 마비된 쌀, 면화, 소금 등 농수산물 수탈항의 기능이 악화되면서 쇠락해져갔다. 여기에 유신정권이 시행한 산업화 호남 소외 정책 등과 맞물려 목포는 30~40년 번성했던 일제강점기 근대 도시 모습 그대로 멈춰서게 된다. 과거 번성했던 오거리와 본정통 거리의 번화가는 날이 갈수록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 목포갑자옥 모자점

일제강점기 패션을 주도한 갑자옥 모자점

어두운 거리와 간헐적으로 눈에 띄는 빈 상점의 빛바랜 입간판과 쓰다 버린 상품 진열장만이 과거 이곳에 목포의 최고 번화가 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목포의 패션을 선도했던 갑자옥(甲子屋) 모자점이 90년의 세월을 이기고 이곳에 있다. 아직도 내부는 일제강점기 지어졌던 시설을 그대로 쓰고 있다. 갑자옥 모자점은 제주도 출신으로 오사카에 있는 낭화상업학교(浪華商業學校)를 졸업한 문공언(文孔彦)이란 사람이 1924년 개업했다. 그는 앞으로 모자가 크게 유행할 것으로 내다보고 당시 목포시가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이곳에 모자 전문상점을 열었다. 본정통과 연결되는 곳으로 은좌통(銀座通)이라 불리던 일본인 중심상거 거리에 조선인이 상점을 연 것은 지역사회에 화제를 몰고 왔다. 상점 이름을 갑자옥이라고 한 것은 1924년 갑자년에 문을 열어서 ‘갑자옥(甲子屋)’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갑자옥 모자점은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호남지압의 중심 도시인 대전, 군산, 제주 등에 지점을 생겼다고 한다. 지역에선 ‘모자상’하면 갑자옥(甲子屋)이라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형성될 정도로 지역 패선을 선도했다. 사업이 번창해 문공언씨는 남종선 무자상계의 상징적 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문공언씨는 파나마 제모 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자 강습소까지 개설해 인기 강사로도 세간에 이목을 끌었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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