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목포 해안로 루트를 따라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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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목포 해안로 루트를 따라서-4
  • 류용철
  • 승인 2018.02.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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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새끼! 그 것이 머시다요! 남사스럽게…”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두 번째 연재로 목포의 심장을 걷는 ‘목포 해안로’루트를 구상해 본다.
△오거리(吾居里)에서 시작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해운사 건문 △옛)조선은행(현 목포문화원 건물) △옛)화신백화점 △갑자옥 모자점 △목포 백반의 거리 △목포 민주화 산실 고 안철 장로 약국 △옛 수문통 거리 △민어의 거리 △옛 힛빠리 골목(항동시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유년시절 집터 △만호진 △여객선터미널 △금화동 유곽 △ 서산동 조금새끼 골목 △할매집 △보리마당까지 오르는 길이다.

이번 ‘목포 해안로’ 골목길 연재는 네 번째로 △금화동 유곽 흔적 △서산동 조금새끼 골목길까지 오르는 길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근대도시의 화려함에 감춰진 유곽(遊廓) 금화동

이곳을 내려가면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일제식민지 지배 기관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위로 일본영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일제가 조선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사법기관과 각종 행정기관이 자리했다. 뒷골목엔 아직도 일제강점기 번성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건물이 남아있다.

도시의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황폐한 성의 거래가 있던 곳이 있다. 금화동이다.

이곳은 일본인 거류민촌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일본인들이 윤락촌으로 조성했다 것이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인 마을 온금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목포에 유곽이 생긴 것은 1905년도의 일이다. 목포항이 1897년 10월에 개항했으니 개항 후 8년만이다. 유곽은 당시 죽동 지역, 흥선사(興禪寺)와 통조사(統照寺) 사이 저지대에 생겼다. 그 후 주거지가 확장되면서 1914년 현재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이 바로 앵정(櫻町), 사쿠라마치다.

목포역에서 대반동으로 가는 길, 목포 수산업협동조합 건너편인 금화동, 유달동 지역은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로서 그 뒷산에는 벚나무가 무성했다. 그래서 꽃이 피어 비단같다는 의미의 금화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사쿠라마치’로 부르기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금화동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곽으론 주길정(住吉亭), 현해루(玄海樓), 만직지루(萬直志樓), 삼교루(三橋樓)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곽으로는 일출정(日出亭), 명월루(明月樓), 영춘정(永春亭) 등이 있었다. 1936년 목포에는 요릿집이 12개소, 음식점이 336개소, 카페가 20개소, 청루가 7개소였는데, 이들 업소에 수용된 도색노예는 모두 425명이었다. 종류별로 보면 예기(藝妓) 49명 내 조선인 21명, 여급 90명 내 조선인 31명, 창기(娼妓) 82명 내 조선인 48명, 작부(酌婦) 204명 내 조선인 202명으로 총 425명중 조선인인 302명이었다. 당시 한 잡지는 “목포는 도색노예의 도시로 문화의 쓰레기통이란 인상을 준다.”고 전한다.

1935년 9월 22일자 ‘남국(南國)의 항구도시, 목포의 쌍곡선’이라는 제하의 『매일신보』기사는 목포의 비약적인 발전에 윤락사업이 번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업도시 목포의 발전의 반영적 일면상(一面相)인 숫자적 통계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거니와 늘어나는 것은 음식점과 음주청년과 ‘거리의 신사’뿐이라고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목포의 발전은 조선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즉 ‘목포의 발전=조선인의 희생’이란 등식 위에서 근대도시 목포가 성장했다. 그런데도 목포의 상업적 발전은 유흥의 발전으로 그 수준이 평가될 만큼 퇴행적 분위기로 흘렀다.

이런 유흥의 퇴행적 분위가 조성되는 데는 목포의 경기가 초호황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목포의 발전 그것은 목포의 빛이었다. 하지만 항구도시 목포의 퇴행성과 타락적 향락은 목포의 그림자로 남아 오히려 그 빛을 가리고 말았다.

당시 목포 사회상은 향락을 위해 주색, 기박(棋博), 마작이 발전했다고 전한다. 주색의 정도가 지나쳐 도색노예 도시란 오명에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먹거리계, 처녀계 등이 유행했다. 이런 모임에는 주부에게까지 번져 일선 학교에선 모임을 자제하고 가정교육에 힘써주라는 경고문까지 광고로 낼 정도였다.

금화동 유곽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조금씩 그 위용을 잃어갔다. 당시 일본인이 떠난 유곽들은 이웃 조선인들이 차지했거나 일본 시모노세키 등지에서 살던 조선들이 귀국 뒤 수용되면서 가정집으로 변모해갔다. 일부 일본인들은 곧 한국에 돌아올 것이라며 유곽에서 일하던 한국인등에게 일시적 위임해놓고 떠나기도 했다.

지금도 금화동 12-5호를 비롯해서 금화동 지역에는 2층짜리 옛 유곽 4채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60년이 지나면서 모양은 조금씩 변했지만 옛 유곽의 모습을 그대로 유추할 수는 있다. 금화동 12-5호의 유곽의 경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ㅁ’자 형태 안에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로, 세로 각각 4m 정도인데 나무 난간과 함께 유리벽으로 막아놓았다고 한다. 이 유곽의 경우 광복 후 호남전업사에서 사택으로 쓸 요량으로 구입을 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청진 등에서 배를 타고 피난 온 피난민들의 대피소가 됐다.

당시 각 1가구에 방 1개씩을 썼는데, 24가구가 머물렀을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이곳에 살던 4살짜리 꼬마가 물에 빠져 죽자 어른들이 나서서 연못을 메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방 2개를 만들어서 다른 피난민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김경자(52) 씨는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면서 “하지만 집이 얼마나 튼튼한지 앞으로도 몇 십 년은 족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봄마다 벚꽃이 활짝 피었던 유곽 뒷산 즉 러시아산도 피난민들이 점령하면서 벚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판자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모(80)씨는 “당시 이북에서 온 피난민뿐 아니라 시모노세키에서 쫓겨난 재일조선인들도 유곽에 집단 거주했다”고 회상했다. 서 씨는 “해방 직후 바로 유곽이 없어 진 것이 아니라 몇 년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번성하다가 전쟁 즈음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전했다.

서민의 애환 서린 서산동 골목길
 

 

가파른 골목길을 오른다. 세월이 갈수록 오르기 힘들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새털처럼 수많은 날을 보냈지만 아직도 삶의 끈을 잡고 있다. 설니홍조(雪泥鴻爪), 눈에 기러기가 발자국을 남기고 날아간다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말한다. 영원히 남아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과거의 흔적은 덧없이 흘러 사라져버린다.

내 부모가 그러했듯이 지금 내가 그곳에 남아 날숨을 몰아쉬면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칭얼거리며 생태를 쓰던 그때. 마을 공동 우물에서 먹을 물을 길러 밥을 짓고 세수했던 시절. 술 취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오며 다니던 그 골목길에 내가 지금 서 있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책임감으로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았던 아버지와 항상 죄인처럼 숨죽이며 자식의 안위를 보살피는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렇게 그 때 어머니의 나이만큼 먹고 지금 서있다. 가파른 언덕 골목길이 싫어 일찍 마을 떠난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곳이 선창 목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한다.

김선태 시인은 ‘조금새끼’라는 시에서 이곳을 이렇게 노래했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마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끼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 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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