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자원봉사단체협의회 김명진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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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자원봉사단체협의회 김명진 초대회장
  • 최지우
  • 승인 2018.02.0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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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남을 위한 시간 내 삶의 의미요 원동력이다”
 

[목포시민신문=최지우기자]생각해보면 지난하고 고달픈 삶이었다. 60갑자를 훌쩍 넘긴 긴 세월…힘들었던 내 삶을 반추하며 다른 이들을 생각했다. 다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고 했지만 모질게 살아가는 난 절대 거기서 거기라는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제외된 이방인이었다.
그래도 원망보다는 주어진 운명에 최대한 순응하며 하루하루 주어진 작은 결실에 감사하며 살았다. 세 아이들이 잘 자라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고, 가장의 의무가 덜해지는 요즘엔 보잘 것 없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낼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시간을 쓰는 자원봉사!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기쁨이요, 의미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5월 결성된 목포시 자원봉사단체협의회 김명진 초대회장이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느끼는 소회다. 그 자신 어느 누구보다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오며,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알기에 그들에게 더 가까이 더 따뜻한 이웃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목포시에는 198여개 봉사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각 단체들은 제각각의 봉사를 해 왔었다. 6년째로 접어든 사랑의 밥차에도 43여개의 자원봉사단체가 활동을 하며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좀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자원봉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결성된 협의체가 목포시자원봉사단체협의회다.
그동안 여러 봉사단체에서 활동을 하며 사랑의 밥차 첫 시작부터 함께 해온 김명진 회장이 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명진 회장은 “그동안 여러 봉사단체들이 봉사를 하다 보니 일정이 겹치고, 복잡했었다. 좋은 일 하자고 모였지만, 만족스런 봉사를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시에서 나서서 협의체를 만들었고, 첫 협의회장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며 “남에게 보여주는 봉사가 아닌 진정으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노력하겠다. 여러 봉사단체들과 서로 협력하여 복지 사각지대에 소외되어 있는 이웃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과 결심을 밝혔다.

나만 잘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내 것을 나누는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김명진 회장의 아름다운 삶의 궤적을 쫒았다.

김명진 회장은 신안군 도초면 가난한 농사꾼 부모님의 3남7녀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하고 연로했던 부모님은 김회장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도우며 초등학교는 겨우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 입학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형과 누나들이 있었지만 자신들도 근근이 살아가며 동생한테까지 쓸 마음의 여우가 없었다. 초등하교 졸업 후 큰 형님이 운영하는 서울의 중국집으로 가게 되었다. 여느 형제들처럼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로 형 밑에서 중국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집 배달을 시작으로, 차츰 차츰 주방에서 요리를 배워나가기 시작했지만 형의 모진 가르침은 어린나이에 상처로 남았다.

중국집 주방장으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형한테 독립을 했다. 남 밑에서 월급을 받으며 자신만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20대 초반 매월 일한만큼 대가를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소개팅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던 때였다. 가난했지만 꿈이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꿈은 22살 되던 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목포에서 중국집을 개업하게 된 누나가 남의 집에서 일하느니 자신을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부른 것이다.

그렇게 목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랑하던 사람과도 잠시 헤어져 2년 동안 편지로만 마음을 주고받았다. 

2년여 동안 열심히 일을 하던 중 무릎연골에 이상이 생겼다.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오면서 더 이상 주방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의 꿈을 꾸던 25세 젊은이는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기약하지 못한 체 고향인 도초로 잠시 떠났다. 귀향을 하며 지금의 아내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는 김 회장의 이판사판 심정을 담았다. 아내가 자신을 떠난다 해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회장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 아내는 편지를 받자마자 목포로 내려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지원군으로 함께 하고 있다.

아내의 정성스런 간호덕분에 무릎도 좋아지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두 아이를 키우기엔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맞벌이를 해야만 했고,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지난해 100세로 돌아가실 때 까지 쭉 김회장과 함께 살았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사글세방만 7번 이사할 정도로 힘들게 단칸방에서 생활을 하던 차 주방장으로 있던 가게 주인에게 직접 차려서 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당시엔 내 가게는 꿈도 꾸지 못하고 겨우 하루하루 살아가던 때였다. 전에 일했던 가게 주인이 비어있는 가게를 소개 해 주며 보증금 500만원을 선뜻 빌려 주었다. 그렇게 산정동 라인아파트 상가에 최초 내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가 35세 때였다. 그때 나를 도와줬던 그분은 지금도 은인으로 생각하며 친 형님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가게 입지조건이 좋아서 장사는 잘 되었다.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겨나면서 ‘사글세 방에서 먹을 것이 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내 가게를 가지고 돈을 벌고 있으니 이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으로 기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게가 쉬는 날 출퇴근 하면서 항상 봐오던 경혜보육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 주었다.

30년 자장면 봉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게가 쉬는 날이면 자장면 재료와 아이들 간식, 학용품을 사서 목포시내 시설들을 돌며 자장면 봉사를 했다. 신안 압해도에도 시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배를 타고 다니며 자장면 봉사를 했다.

자장면 봉사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며 내조하고 있는 특급 조수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내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조력자요 응원자다. 나보다 더 봉사를 좋아하고 앞장 서는 사람이다. 그래
서 감사한다”고 아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배움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김회장은 지난 2009년 중학교 과정을 시작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과학대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다. 전문적인 복지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도 한 몫을 했다.

김회장은 매주 TV에서 방영하는 여행방랑객 ‘집시맨’들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마다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노후에 차를 몰고 발길 닿는 대로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자장면 봉사를 하는 것이 꿈이다.

“인생 뭐 별거 있나요? 내거 나누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쓰임 받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 되는거 아닌가요?”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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