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섬의 큰 소리꾼, 장필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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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의 큰 소리꾼, 장필재-2
  • 류용철
  • 승인 2018.06.2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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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지키고 사는 섬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①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본보는 신안군 문화원에서 최근 발간한 ‘전통지식의 화수분 섬의 생애사’를 기반으로 김경완 사무국장 도움으로 ‘섬을 지키고 사는 섬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시리즈를 마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첫 번째 순서로 신안군 장삼도 부속 섬인 마진도의 장필재 소리꾼이 게재된다. 이어 다음 순서로는 진도 가사도 윤갑율 상여소리 주인공과 김막래 할머니의 이야기가 차례로 총 여섯 차례 게재될 예정이다.
본보는 장필재, 윤갑율, 김막래 등 3명의 진정한 섬의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섬 문화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섬 전통 문화 계승 발전에 대한 대안을 고민해 본다.

<글 싣는 순서>
① 작은 섬의 큰 소리꾼 장필재-1,2,3
② 한 많은 상여소리의 주인공 윤갑율-1,2
③ 악착같이 놀 줄 아는 김막래-1, 2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골네가 노래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장필재는 그런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군에서 제대한 뒤라 어디에서도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의지한 사람은 동향인인 이부천(하중숙 보다 몇 살 적었음)이라는 소리꾼이었다. 이부천이 오음리를 떠나 육지로 갈 때는 하중숙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도출신의 선생 밑에서 공부한 사람을 만나 연습하면서 곧 기량을 갖춘 소리꾼이 되었다. 이부천은 당시 직접 작곡을 하고, 혼자 노래를 부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나이롱 극장에서 재주를 펼치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부천이 자신이 활동하는 곳의 주소를 하중숙을 통해 보내 장필재를 찾았다. 장필재도 시골에서 겨우내 화투치는 것이 일인데, 나이롱 극장에 가면 소리에 소질이 있으니까 겸사겸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 대구로 올라갔다.

이부천을 천신만고 끝에 만났을 때는 돈 있는 것을 사기당하고, 장필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돈이 있어야 단원들을 데리고 다닐 텐데….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대구에 있다가 마산으로 가 제약사인 윤소장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가 약을 외상으로 내주었다. 결국, 대구에 하숙집을 하나 얻어서 생활하면서 나이롱 극장을 운영하고 돈을 벌어 갚으면서 공연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옛 선창.

“나는 그때 약 팔아먹고 살았어. 사실은. 지방에서는 낯을 많이 아니까 할 수가 없고, 소리를 하면 단골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다녔다니까. 제대하고 경상도로 올라갔어. 남모르는데로. 군대는 스물 한 살에 가서 스물여섯에 제대 혔어.

6년을 근무했어. 6.25 참전용사지. 제대 막 해가지고 해먹을 것이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약장사를 해야겠다 해서 대구 칠성동 냇가에다가 자리를 잡아 포장치고 무대를 차렸어. 사람들을 불러다가 약 팔라고, 모래사장 같은데 무대를 봐서 만들어. 거기서 연극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는, 낮에만. 나이롱극장이 그렇게 흔치 않았지.
거기서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연극으로 많이 하지. 소리 공부를 한 단원들을 세명 데꼬. 제약사에서 약은 받아다가 약을 선전도 하고 소리하면 소리 들을라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모이면 약도 팔고…. 약은 팔면 이익이 많아. 감기약도 오래 저장되면 효력이 적어요. 우리가 파는 약은 막 갖다 팔잖아. 입소문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워. 저녁에 먹으면 아침에 낫드라 그래서 약도 잘 팔리고, 구경도 할라고….
그렇게 쏠쏠하게 지냈제. 마산제약사라고 윤소장이란 사람이 제약소를 했어. 그 사람도 우리가 약을 팔아주니까 좋아하고 그랬지.”

그렇게 돈을 벌며 먹고 살 정도가 되었는데 느닷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부에서 집회를 전면 금지시킨 것이다. 사람 셋만 모여서 마이크로 이야기하면 잡아가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약을 팔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이부천씨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아가지고 집회를 못하게 하는 거야. 나는 수 백 명을 모아놓고 약을 팔아야 한디. 사람을 세 명만 모이면 잡아가 부러. 디지게 패불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향에 돌아왔지. 안굶어 죽을란께…. 한 1년을 못했어요. 그래도 이부천씨는 여기 와서 면단위로 다니면서 약을 팔기는 팔았어. 둘이서 같이 다니면서 팔았지. 먼저 지서를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시골이니까 모이는 것이 가능하니까….

가이나(여성) 둘을 데리고 다녔어. 목포국악원에서 공부하는 젊은 여자들 데리고 다녔어. 북장구, 한복 갖추고…. 신안만 1년 남짓 다녔어. 안좌, 하의, 지도 다 다녔어. 돈 많은 민간인 집에 너른 방이 있으니까 거기서 자고. 제일 재미있는 것은 어른들이 싹 와요. 그때만 해도 남녀 간에 합석을 하지만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여자들이 못 들어왔어. 배깥에서 소리를 듣제. 그러면 창구멍이 남아나는 것이 없어. 그 소리하는 사람들 얼굴을 볼라고 하거든. 처녀가 됐든 아줌마가 됐든…. 인기가 좋았지. 소변보러 가면 잡아 댕기는 여자들도 있어. 약 다 떨어지니까 끝나 부렀어. 박정희가 정권만 안 잡았으면 괜찮했어.”

장필재의 조카 장보영은 국악인으로 고향 장산도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진행한 바 있고, 남도소리울림터에서 제자들과 함께 발표회를 가진 적도 있다. 그때마다 참석하는 장필재는 조카의 국악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옛날에는 국악 하는 사람들이 천시 받았지만, 지금은 대학에서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것을 자랑하며, 어딜가든지 대우받고 존경받는 지금의 세상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신안문화원=김경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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