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이 놀 줄 아는 진도사람, 김막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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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놀 줄 아는 진도사람, 김막래-1
  • 류용철
  • 승인 2018.07.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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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조도 소문난 끼 많은 아가씨 가난과 싸운 시집살이
 

[목포시민신문=정리/유용철기자]김막래는 1944년 생으로 2017년 현재 74세다. 조도면 하조도의 곤우마을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이름이 ‘막래’가 됐다. 오남매 중 언니가 셋, 오빠 하나, 그리고 자신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현재 90세가 넘은 큰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막내딸을 가장 예뻐했다고 한다.

“너나 아버지가 데꼬 상에서 밥 먹었제. 우리는 뭐 아버지 옆에 가나 봤데. 쩌 오도 못하게 했어.”(김막래의 큰언니 김막단)

여자들은 부엌에서 밥을 먹고 남자들만 방 안에서 상을 받아먹던 시절에 막내딸만 아버지 옆에 두고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다. 곤티미라고 불리는 고향마을에 살던 시절에 가장 많이 한 일은 나무를 해 놓은 것을 머리에 이고 와 밥하던 기억이다. 그래도 조도면 소재지인 하조도는 여러 마을들이 있고, 인구도 많으며 번화한 섬이었다. 시집가기 전 억센 성격 탓에 동네 남자들이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큰 애기 때도 엄청 놀았어. 큰 애기 때도 술을 먹었제. 엄매도 술을 자신께 같이 먹어. 막걸리 집에서도. 그럴 때는 억씨게 놀았어. 나무하러 갔다 밤에는 막 강강술래 한다고 줄 띄고, 십대 때 쫌 많이 놀아 봤겄구만 부잡허게, 섬에서는 21살이면 쫌 늦은 시집간 거잖아. 그라제 다른 것 부잡한거 아니고 막 놀고 놈의 뭣 해다가 먹고…. 연애는 둘이 좋으면 그냥 같이 논 것이지. 그냥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이었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사방 팔방 돌아다니면서 같이 놀았어. 한 방에서 놈시롱 뭔 노래 부르고 잡담할거 생기면 잡담하고…. 나는 그란데 성질이 뭣해 가꼬 누가 편지를 하나 갔다 주더라야. 그래서 이웃집 친구가 그랬어. 그래갖고 친구를 오라고 해 갖고, 니가 한 번만 더 그런 짓 하면 막 죽인다. 응 니가 죽을래? 살래? 그란께 그 머시마가 안 할게 다시 안할게…. 그랬단께. 내 별명이 곤티미 깡패였어. 몇 년 전에도 동네 머시마 하나가 내가 너가 가시나 때 좋아했는데, 니가 무서운께 말 못했어 이러니깐 어째야? 니가 깡패같이 막 나 죽일라고 해서 못 했어 이러데”

조도에서 가사도로 시집온 큰 애기
 

김막래는 고향 조도에서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다가 스물 한 살에 가사도로 시집을 오게 됐다. 집안의 올케가 한 씨인데, 시댁의 시어머니도 같은 한씨라 중매가 들어온 탓이다. 그는 가사도에 올 때 ‘옥소호’를 타고 왔다. 가사도는 목포에 나갈 때 배안에서 바라보던 것 뿐, 처음으로 섬에 내려 마을로 들어갔다. 지금은 가사도에 행정 업무를 맡는 가사출장소가 있지만 그때는 모든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조도면사무소로 가던 때였다. 그래서 21살인 1964년 가사도의 경주 이씨 집안으로 시집왔을 때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신랑은 6살이 더 많았다.
“인자서 여가 출장소 있제, 그 때는 조도로 다 댕겼어. 시방 같이 이런 좋은 배요? 글 안하면 거서 자고 오고, 못 오고 그란께 뭐가 잘못 돼가꼬 나이 몇 살 올라가고 내려가고…. 거그 가서 신고해야 한께.”
김막래는 결혼 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안계셨다. 시어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라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온갖 이야기를 다 꺼내지 않았지만, 며느리는 늘 뒷전에서 일만 할 뿐 자식들 교육에도 관여하지 못했다. 큰딸을 목포로 유학 보내고도 필요한 반찬을 가져 다 주는 것도 어머니인 자신은 배제되고, 시어머니가 그 일을 맡아하면서 혼자 목포 나들이를 했다.

 

한번은 김막래가 집에서 싸움을 하고 목포로 나가 딸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 젊은 엄마가 있었냐?’고 놀랐다고 한다. 그동안 늘 할머니가 다녀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동생이 서울에서 결혼식을 할 때도 시어머니는 혼자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남편과 자신은 섬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우리 시어머니 아주 별난 사람이여. 시어머니는 친정이 조도 나배도여. 우리 동네에서 저그 보면 저 건너편에 있는 섬인디 나배도 한씨여, 아이고 우리 시어머니가 일찍 혼자 되가꼬 자식들이 산 꼴을 못 보더만. 질투하더라고. 어디서 엿듣기나 하고. 한 번은 영감이 물 떠오라고 해서 부엌으로 나갔는디, 캄캄한 저쪽에서 숨소리가 그렁그렁 나. 우리 방을 엿듣다가 내가 물 뜨러 나오니깐 얼른 숨어든 것이여. 그래서 방에 들어가서 성냥 갖고 켜보니깐 구석에서 우리 씨엄씨가 욕하면서 나와. 또, 씨엄씨가 욕심이 많해서 아들이 내 편을 한다고 하면 아주 죽어. 그란께 맨날 지그 엄마 편들고 그랬제. 나 때렸어라. 아주 원 없이 맞았제. 나도 용한 사람이야. 그렇게 맞고 살고 일하고…. 인자 즈그 엄마랑 싸운다고. 그란께 나도 죽어라고 대들제. 너 죽고 나 죽자 그러고 그믄 집에서 싸우다가 나갔을 것 아니에요? 그러면 그냥 이웃집에 갔다가 오제. 나 안살라고 몇 번 나갔어. 목포에 우리 언니가 산께. 그라면 또 우리 영감탱이가 또 그런 꼴 못 봐. 결단코 찾아와 터치 안한다고, 안 때린다고 그래도 소용없어. 요즘 남자들은 그랬다간 바로 끝장이여.”

이런 이야기는 종종 섬에서 듣는 이야기다. 같은 동네의 00네 어머니도 장가간 아들이 자는데 옆에 감자를 보관하는 방에 들어가 숨어서 자기 아들과 며느리가 자는 것을 엿듣다가 둘이 사랑했던 것을 악쓰고 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으로 고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런 경우가 도시나 시골에서 종종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20년을 살던 어느 날 김막래는 드디어 섬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실행했다.

무작정 떠난 서울살이 20년

“21살 때 시집 와가고 여그서 20년 살다가 내가 못 살 것어. 그래도 인자 뭐 놈도 산데 나라고 못 살것어? 아무 목적지도 없이 나가 부렀어. 우리가 막소 하나를 키웠거든. 소가 우리 재산이었어. (동생)네가 우리 소를 73만원인가에 샀어. 그라고 쩌 아래 집서 돈 100만원을 빌려 갖고 무작정 하고 나갔제. 서울 가서 보증금 100만원 걸고, 한 달에 6만원 주고 사글세를 얻었어. 애들 다섯 명이. 우리 영감은 즈그 엄마랑 살라고 내가 못 오게 했는데 우리 식구가 나 없이 살것어? 그란께 따라와서 같이 살았제. 할마이는 안데꼬 갔제. 할마이 땜에 못산데 내가 데꼬 나가?”

“공장도 다니고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 맨 처음에 가서 인형공장을 댕겼어. 옛날 그런데는 인형 수출한께 한 집 건너 인형공장이었어.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서 거그서만 계속 살았어. 고척동 거그가 옛날에 팽 공장 천지여. 그런데 그 구로구 공단이 저 안산 시화공단으로 가부렀어. 처음에 글로 이사 갈 때에는 인자 우리 못 온다, 그만 댕길란다 한께 사장이 우리 안 놓을라고 인자 출, 퇴근 시켜줬지. 봉고차로 공장장이 운전해서. 그래갖고 13년 다녔어. 결근 한번을 안 해봤어.”
/신안문화원 김경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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