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이 놀 줄 아는 진도사람, 김막래 - 2
상태바
악착같이 놀 줄 아는 진도사람, 김막래 - 2
  • 류용철
  • 승인 2018.08.01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년만에 ‘꾼’의 귀향…마을에 다시 울리는 상여소리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남편은 서울에서 막일을 하면서 생활했다. 남편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을 늘 그리워하며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아파 일을 하지 못하고 가사도에 내려오게 됐다.

그리고는 안타깝게도 56세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때 김막래의 나이는 50세였다. 김막래는 남편을 먼저 보낸 후 그토록 원하던 고향 가사도에 남편을 모셨다. 그리고 매년 한번씩 가사도를 찾아와 벌초하고 올라가던 세월이 11년이었다. 그럴 때 마다 불편한 것이 많았다. 5남매 자녀들이 아버지 산소를 찾아올 때마다 머물만한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막래는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분가시킨 후 막내까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할 때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자기는 ‘애들 여위고 시골 가사도 가서 산다’고 했어. 근데 못했지. 그래서는 나는 애들 여의고 뒤로 뭣하면 시골 가사도 가서 산다 그러기에 그러면 ‘그러쇼’ 했는데 오기 전에 아파가지고 죽었지. 그래도 여그 이 아래 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어. 인자 애들이 지그 아버지 산소를 찾아와도 뭐 가까운 집안 없고 불편해. 그러다가 막내가 유학 간다고 할 때 ‘너도 없고 한께 나도 조금이라도 젊어서 가서 동네 사람들하고 살란다. 늙어가꼬 거그 왔다고 하면 놈한테 뭣해야...’하고 내가 공장 다니면서 이 집 짓으라고 하청을 줘부렀어. 나는 여그서 공장 다니다가 집 다 짓어지면 내려갈란다 그랬제.”

김막래는 안산에서 공장에 다니면서도 앞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할 가사도에 거처를 마련하는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집을 다 지었다는 전화를 받고는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참 열심히 살았다. 이젠 떠나도 원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막래는 괴롭히던 시어머니도 없고(시어머니는 아래 집에 혼자 계시다 중풍에 쓰러져 고생하시다,

서울의 아들들 집을 전전하다가 사고로 크게 다치고 결국, 고향 가사도에 돌아온 후 5일 만에 돌아가셨다), 믿음직한 남편도 없지만 가사도에 돌아와 자그만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틈나는 대로 마을주민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노는 것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배우는 순간이다.

“내가 (공장 다닐 때) 컴퓨터 기계를 다 작동하고 그랬어. 그 기계가 다 영어로 써졌어. 그래서 나 영어 배워야겠어야 이런께 막내 딸 지가 다 갈쳐줬어. 시방 기억력이 없지 그럴 땐 한 두 번 보면 다 기억을 했어. 우리 사장도 내 말이라면 아주 끔뻑했어라. 일 잘한다고. 그래서 나중에 나 간다고 한께 나를 안 놀라고 해. 막 이런 컴퓨터 기계 열 대가 다 내 선반에 있었어. 그런 것을 한께 나를 안 놓을라고. 그래가꼬는 지그들 가까운 식구 다 모여가꼬 회식했제. 나 인자 간다고. 일할 때도 논 데는 내가 제일 잘했어. 공장에서 일하다가 놀러 가면 사람들이 전부 우리 방으로 와. 우리랑 놀면 재밌다고. 내가 화토 치제, 술 먹제, 남자 이상이란께.”
 

20년 만에 돌아온 가사도
 

 

김막래는 나이 61세가 되어 가사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집안에 남아 있던 땅을 서울에 살 때 그렇게 파라고 했지만 안 판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혼자 농사를 조금씩 지으며, 집도 가지고 살고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가사도는 주 수입원이 톳양식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규모로 톳 양식을 하기 때문에 연 수입이 1억이 넘는 경우가 많다. 혼자 사는 노인들도 톳을 조금씩 양식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있다.

가사도에서 초상이 나면 반드시 상여소리꾼을 세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상례였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상여소리를 맡았지만, 약 10여년 전 부터는 진도에서 소리꾼을 모셔와 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돌아가신 분은 보통 화장을 하는 탓에 구지 상여도 이용하지 않는 추세이다. 하지만 근래 상여를 들고 오랜만에 상여소리가 퍼지기도 했다.

“근데 그 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그서 다 초상했어. 상여가 나가면 상여소리도 하고, 그란디 시방은 진도에서 데꼬 와요. 진도에서 소리꾼이 와. 여자들 둘이가 북 쟁이 하나하고 꽹과리 오고 그런 소리꾼이 와. 셋이 남자 하나, 여자 둘이 소리꾼이…. 동네에서 윤생수씨가 해도 와. 여그는 일단 그 사람들이 잠깐 쉬거나 할 때 그렇게 할 때 오고 옛날에 그런 사람 안 올 때나 했을까 요즘은 그 사람들이 한께 그 사람들 잠깐 쉴 때 조금 도와줘. 여그 가사도가 옛날에 돈이 막 뭐한께 사람들 오면 돈 많이 씩 벌었어. 거그서 요구한 돈이 있어. 그라고 인자 놀면 팁 많이 나가제. 자식들이 잘 놀아라고 그냥 막 돈을 엄청 써. 그라고 즈그들이 직접적으로 막 돈 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정성이 부족하구나…. 안 내려온다….’ 그런 뭣도 있어.”

가사도에는 신안군에서 시집온 분들이 몇 분 계신다. 가까운 장산도 출신은 없지만 도초도에서 오신 분들이 있다. 하의도 출신들도 있다. 결혼은 예전 선박의 항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도에서 출발해 가사도를 경유 목포로 가는 배편이 있고, 목포에서 출발해 가사도를 경유해 조도로 가는 배편이 있다. 물론, 가사도에서 진도 본도의 쉬미항으로 연결된 정기선도 있다.

문제는 도착시간과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 두 지역에서 출발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경유하는 섬의 사정에 따라 배시간이 늘어지기도 하고 당겨지기도 한다. 가령, 한가구, 두가구만 거주하는 섬에는 승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섬들을 경유하는 배이기 때문에 각 섬에 내리거나 타는 승객이 없으면 바로 통과, 그 다음 섬을 경유하는 시간이 당겨지는 것이다.

또, 밀물과 썰물의 차이, 조금과 사리의 차이에도 배시간이 변화된다. 조도에서 오는 여객선이 일반적으로 가사도에 먼저 도착하는데, 물때에 따라 어느 배가 먼저 오는지 달라진다. 썰물 때는 목포에서 오는 배가 빨리 도착하고, 들물이면 조도에서 오는 것이 배가 더 빨리 도착한다. 이렇게 가사도를 찾는 배편이 불편하지만 참 아름답고 인심이 넘치는 섬이다. 차를 가지고 와도 좋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도 멋진 섬이다.

“여기는 섬이어도 인심이 좋아요. 술도 주고 모르는 사람이 와도 커피도 주고 그란디, 진도는 안줘요. 진도는 어찌 그라냐면 장 있는 동네가 인심도 박해요. 뭣이거나 장에 갖고 가 팔라고 나눠먹고 그런 것이 없드만. 이런 데는 내다 팔 그런 것 없은께 내 집에 뭐 있으면 막 다 나눠먹고 하는데 그런데는 장이 있기 때매 인심이 박해. 옛날에 우리 조도 창리가 장이 있어서 그라더라고.”

지금도 가사도 사람들은 진도 장에 나갈 때 내다 팔 것이 없다고 한다. 나가면 생계에 필요한 물품이나 사올 뿐이다. 참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섬이 아닐 수 없다.
정리=유용철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