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교회와 목포 3·1운동 만세시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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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교회와 목포 3·1운동 만세시위지
  • 김영준
  • 승인 2019.03.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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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학생이 만세운동 이끌어
 

[목포시민신문=김영준기자]1919년 4월 8일 조용했던 목포 거리는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목포의 4.8독립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 등이 주축을 이뤘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했던 1897년에,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이 세웠다.

당시 동경 유학 중이었던 유학생과 상인들을 통해 동경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시기 양동교회 지하실에서 곽우영 장로를 비롯해 서기견, 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강석봉, 양병진, 박복영 등 교인들은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격문, 독립신문 등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 역시 교내 기숙사와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태극기를 만들었다.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인을 통해 광주에서 전달 받았다. 그들은 거사 하루 전인 7일 밤, 목포 시내 상점과 가정을 돌며 다음 날 만세운동참여를 독려했다.

일본경찰과 헌병은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 드디어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아침, 양동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기독교인들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는 북교초등학교로 각각 뛰어들었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은 삽시간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시민들도 합세해 이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목포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후 정명여학교는 1921년 만세운동을 다시 펼쳐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렀고 1937년에는 영흥학교와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복교하였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 역시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과 기독교인, 상인 등이 주도했으며 4월 8일 만세운동 이후 목포의 항일 정신은 일제 강점기 내내 저항과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명여자중고등학교와 목포시는 매년 4·8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김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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