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생존의 사이 - 김인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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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과 생존의 사이 - 김인숙 칼럼니스트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4.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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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숙자가 있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현재의 모습으로만 그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그 노숙자가 예전에 어떻게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혹여라도 그 노숙자의 냄새가 느껴질까봐 피해서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노숙자가 밥을 먹는 곳은 복지관에서 마련한 노숙자를 위한 식당이었다. 매일 12시가 되기 전 줄을 서야하지만, 그곳에 가기위해 노숙자는 씻고 머리를 빗고, 길을 나선다. 공짜 밥을 먹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곳에서 연결해주는 직장을 얻고 작은 방 한 칸이지만 몸을 뉘일 곳도 마련을 했다. 그렇게 아주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었을 때나 가능한 완결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노숙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길에서 3년을 살아가기란 사람도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것 보다 치열한 삶 일 테지만 결국 그는 노숙자이니까.

그럼 우리가 아는 길고양이는 어떠할까? 길고양이의 평균수명도 2~3년일 뿐이다. 태어나보니 길이었고, 하루에 한 끼 먹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작은 고양이는 어미로부터 독립을 한 후 그렇게 살았다. 그날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찾아 헤매던 곳에 너무 훌륭한 밥이 놓여있었다. 배가 터지도록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차원이 다른 배부름이었다. 작은 고양이는 매일 그곳을 찾아간다. 그곳만 가면 배부르게 먹을 수도 있고 깨끗한 물로 마음껏 목을 축일수도 있었다. 볕도 잘 들어 작은 고양이는 그곳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한참 잠을 자는데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 넌 누구니? 어디서 왔어? 괜찮아. 괜찮아.”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몸을 만진다. 그 손길이 싫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롱고롱 소리를 내고 만다. 눈을 떠서 사람을 바라본다. 고양이는 알고 만다. 그 사람이 이 밥자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밥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러 그곳을 찾아간다.

작은 고양이는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고양이가 되었다. 그날도 고양이는 그곳을 찾아갔다. 그날은 알갱이 밥이 아닌 거의 맛볼 수 없는 캔이 쇠 통 안에 놓여있었다. 처음 보는 쇠 통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캔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먹고 싶었다. 게다가 전날에는 사료도 치워져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 아니겠는가? 망설이다가 통 안으로 쏙 들어가 캔에 입을 대자마자 문이 내려와 그만 갇히고 말았다. 조금 있다 고양이는 그대로 들려 어딘가로 실려 간다. 무서워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는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깨어나 보니 배가 몹시 아프고 귀도 잘려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길고양이는 자궁을 잃고, 귀를 커팅 당했다. 며칠 지나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변한 것은 없었다. 계속 그 자리에서 밥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따뜻한 볕이 드는 곳에서 그루밍을 하고 가끔 멀리 산책도 다니면서 밥 엄마를 반기며 잘 살았다.

캣맘이 꿈꾸는 길고양이의 일상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일상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힘들다는 데에 있다. 캣맘이 관리하는 깨끗한 밥자리와 TNR(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사업)은 길고양이와의 공존의 방법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알려져 왔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공존과 동행을 위한 길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그 모든 것들을 할 수는 없다. 공존과 생존의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을 이제는 실천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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