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배의 마지막 선장 홍도2구 김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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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배의 마지막 선장 홍도2구 김광식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5.0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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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와 관련된 지식과 기억 풍부한 ‘홍어문화재’
▲ 홍어배의 마지막 선장 김광식 사진2. 홍도2구에서 홍어주낙 고르는 일은 모두 어르신들의 몫이다. 사진3. ‘한성호’의 외국인 선원, 왼쪽부터 응반 궤(39세), 네규안 덕(30), 누르안토(37세), 레반 후엉(40세)

[목포시민신문=김경완시민기자]△단 한척의 홍어배가 6척으로 늘어
흑산도에는 한 때 홍어배가 한척만 남았던 적이 있다. 다행히 이제는 6척의 홍어잡이 배가 있다. 춥고 험한 겨울이 지난 지금도 바다에 나가면 날씨가 제법 차다. 홍어배가 한번 조업에 나가면 선장과 선원들은 이틀 동안 한 숨도 못자고 조업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홍어를 2~300마리씩 잡아 와 신안군수협 흑산지점에서 위판하면 그 금액만 3~4천만원에 이른다. 홍어배가 떼돈을 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홍어배 한척을 운영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선원급여와 선박기름을 제외하고도 홍어배가 조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즉, 흑산도 주민들의 세심한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중 하나가 ‘홍어주낙을 고르는 일’이다. 이 작업은 흑산도 지역경제의 모세혈관까지 미친다.

신안군 흑산면 홍도2구에 거주하는 김광식(72세, 1948生)은 25년 전 홍어배가 단 한척 남아 있을 때의 선장이었다. 당시 중국 어선들은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국의 어장을 맘대로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어장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어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바다와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는데, 그로 인해 흑산도 연해는 홍어를 비롯한 어족자원이 급속히 고갈되었다.
“중국 어선들이 우리 영해를 침범해가지고 조업을 할 수가 없었어. 그대는 중국배가 수백 척, 수천 척이었으니까. 새까맣게 밀려들었으니까... 그 당시는 해경이고 어디고 말릴 데가 없었어. 말릴 수도 없었고... 중국 배들이 워낙 많았으니까...”(김광식)

중국배들은 어선의 주낙을 거둬가거나 절단하는 등의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홍어잡이 배들이 하나 둘 조업을 포기하고 다른 어종을 잡는 배로 전환하는 자구책을 마련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김광식의 배 ‘청신호’ 한척만 남게 됐다. 전국에서 흑산홍어의 명맥을 이어간 유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본인도 경제적인 판단을 한다면 다른 어종을 잡는 것으로 전환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전라도의 음식, 흑산도의 대표 브랜드를 스스로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 신안군에서 정책적으로 ‘흑산홍어’의 가치를 인정하고 경제적 지원을 했다. 2년간 2천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것이 김광식에게 힘이 됐다. 전통음식문화를 지키는데 신안군이 힘써 준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홍어배는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는 모두 네 척까지 늘어나면서 연간 15억원이 매출을 올리게 됐다.

△주낙 추리기가 섬에 미치는 사회경제적 효과 커
홍도2구 앞바다는 ‘험석’이다. 파도가 험한 곳이란 뜻이다. 따라서

▲ ‘한성호’의 외국인 선원, 왼쪽부터 응반 궤(39세), 네규안 덕(30), 누르안토(37세), 레반 후엉(40세)

 태풍이 온다는 예보를 들으면 멀리 흑산도에 배를 피난시켜야 했다. 어느 날 잔잔한 바다에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험석 탓에 홍어배 ‘청신호’가 침몰하고 말았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다. 그 사고 이후 김광식은 처조카의 ‘한성호’에 홍어잡이 설비를 한 뒤 잠시 동안만 홍어를 잡았다. 그리고는 아예 ‘한성호’ 선장인 조카에게 모든 일을 물려주었다. 이때 홍어잡이에 적합한 양승기를 계발하고, 닻도 실용적인 구조로 개선한 성과를 거뒀다. 

그 후 한성호가 홍어잡이에 나갈 때 ‘식구미’와 ‘주낙’은 김광식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제공한다. 배에서 조업하면서 먹는 식사와 간식은 물론, 외국인 선원들이 홍도에 내려 다음 조업을 위한 기간에는 선원들의 숙식을 도맡아 책임지고 있다. 주낙바구니를 정리하는 작업은 ‘홍도2구’ 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 다른 일에 매달릴 수 없는 연로한 어르신들이 틈나는 대로 주낙정리 작업장에 내려와 자신의 여력에 맞게 주낙을 추리면, 그때마다 식사와 간식을 제공해 준다. 주낙을 추린다는 것은 ‘걸낙’을 바구니에 끼우면서 ‘아바’와 추 역할을 하는 ‘돌’을 돌과 함께 정리해 바구니에 담는 일이다. 한 동네 이웃인 어른들은 힘들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며 공동체의 유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들은 연간 일정한 수입을 보장 받을 뿐만 아니라 홍어배에서 잡은 잡어들-자연산 광어, 대구, 아귀 등은 일정하게 나눠가질 수 있다. 주낙을 한 바구니 추리는데 1시간 이상 소요되지만, 모두 여력이 되는대로 할 뿐 강제된 할당량은 없다. 홍어배 한척이 홍도2구의 작은 마을에서 어엿한 사회복지시설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도맡아 진행하는 김광식은 홍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도 가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홍어하고 찹쌀떡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일산 집들이를 할 때 목포시장하고 신안군수는 홍어를 가져왔는데 도지사가 못 가져간 거야. 그래서 난리가 났데. 그때는 나 혼자 홍어를 잡을 땐디... 빨리 들어오라는 거야. 들어온께 흑산도에 배가 대기하고 있든만. 그래갖고 홍어 2마리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간 거야. 자기 체면을 위해서...”

“나주 영산포쪽으로 홍어를 싣고 간디, 홍어가 진짜 썩는 거야. 삭힌 것이 아니라 썩어서 뱃간에 구더기가 벌벌 기어 다녀도 그 홍어꼽 있는 어창에 나주 그쪽에서 양반이라는 사람들이 두루마기 입고 홍어칸에 들어가 가지고 ‘이것은 내칸이여...’하고 달라 들 정도였어.”

▲ 홍도2구에서 홍어주낙 고르는 일은 모두 어르신들의 모습.

홍도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 처자와 결혼해 지금까지 홍도를 지키는 김광식. 그는 홍어잡이의 기술계발에도 전념했지만, 달력에 조석표를 넣는 아이디어도 최초로 제안한 인물이다. 지금은 어촌의 많은 달력에 물때가 기록되어 있어 누구든지 만조와 간조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행본으로 발행된 『조석표』를 사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평소 조석에 민감한 홍어를 잡았기에 제안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금, 홍어배에서 사용하는 자연석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빠돌’을 공장에서 일정한 무게와 크기를 가진 제품으로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돌이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에서 주워온 돌이기 때문이다. 조업을 하다 보면 일상적으로 ‘유실’되곤 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자원을 낭비할 수 없다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제안이다.

지금 어촌에서 외국인 선원이 아니면 조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홍어잡는 배에는 한국인 선원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김광식은 자신의 집에 외국인 선원 네 명(한성호 근무)을 돌보고 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안전하게 조업에 임하도록 평소에도 세심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 바다에서 흑산홍어의 맥을 이어가는 그들이 새삼 고맙다.
김경완 연구원(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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