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대반동 아리랑고개의 명소, 부광상회 박광팔씨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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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대반동 아리랑고개의 명소, 부광상회 박광팔씨 만나서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9.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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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자락 무허가 움집 지어 목포 생활 시작
업이사는 사람들과 아옹다옹 살며 에피소드 가득
추억의 통닯집 단속과 함께 폐점 후 슈퍼로 바꿔
부광상회 주인 박광팔씨.
부광상회 주인 박광팔씨.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기자] 2014년 12월 개통된 유달산둘레길은 목포시민을 비롯한 외지관광객들에게 인기 많은 산행코스다. 6.3km의 거리인데 난이도가 낮으면서도 깊은 숲속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도처에 있다. 무엇보다 시내와 다도해의 전망을 관람할 수 있는 매력이 크다.

2개의 아리랑고개
 
둘레길 코스 중에 ‘아리랑고개’가 있다. 이번에 개통한 케이블카 중간경유지의 바로 아래 ‘재’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자동차로 넘어 다닐 수 있는 충무동 아리랑고개는 다른가? 헷갈리게도 모두 ‘아리랑고개’가 맞다. 지금 이야기하는 아리랑고개는 구 제일여고에서 온금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길을 말한다.

재위에 올라서면 고하도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데 그곳에는 아주 오래된 가게가 하나 있다. ‘부광상회’라는 나무 간판이 인상적이다. 많은 유달산애호가들이 한번쯤을 들러 촌닭백숙에 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는 곳이다. 한자는 없지만 주인장 박광팔(1948년생. 72세)은 ‘거둬들일 부, 빛 광’자를 쓴다고 했다. 평소 주위에 많은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취미가 있는 그에게 ‘뿌린 만큼 거둔다’는 뜻의 ‘?’자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순리’라고 믿기에 특별히 좋아하는 글자라고 했다.

박광팔은 완도군 노화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따라 1956년 목포로 나와 정착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온금동에 미리 터를 잡고 있어 같은 동네로 왔던 것.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당시 온금동 산동네의 모습은 어땠을까?

“9살 때 처음 왔을 때 천지분간 못하고 돌아다녔을 땐데 이 아래 천사들이 살았지요. 묏등이 있고 길이 좁았어요. 그 길이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움막이 좌우로 있었으니까. 20채는 못되고...”(박광팔)
재에서 구 제일여고로 내려가는 왼편에 나병환자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불리는 환자들을 그는 ‘천사들’이라고 지칭했다. 한편 재의 반대편에는 여전히 가난한 주민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첩첩이 겨우 비를 비할만한 오두막집들을 짓고 살았다.
 
양철과 루필로 만든 오두막동네

“‘루필’이라고 아세요? 큰 종이에다가 폐유 있지요. 폐유를 로라로 발라서 썩지 않게 묻히는데, 지물상회나 철물점에 가면 그런 종이를 팔아요. 그란께 종이 위에 폐유, 폐유 위에 모래를 뿌려서 자로 재서 팔아요. 모래를 뿌리면 단단하잖아요. 그것을 갖다가 나무 위로 차근차근 (지붕처럼) 쌓아서 못을 박으면 상당히 오래가요. 종이 밑에는 나무만 대고... 비가 안 새게 덮은 거여. 옛날 지붕 덮개가 루필이여라.”(박광팔)

화장실도 재래식인데 주워온 양철이나 판자로 얼기설기 못질을 한 후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준이었다. 쌓인 똥은 퇴비로 쓸 수 있어 무척 귀하게 여겨졌다. 철모를 싸게 사다가 긴 나무를 연결하면 똥을 퍼낼 수 있는 바가지가 되었다.

문제는 상수도였다. 도대체 물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어린 박광팔은 물지게를 지고 동명동 철길의 공동수도까지 다닌 기억이 있다. 가까운 유달산 기슭의 수원지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왜냐하면 수원지 아래의 목포시장, 경찰서장 관사와 인근의 부자집들만 그 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1965년 부광상회 옆자리에서 곧 지금 자리에 무허가로 건물을 지어 옮겨왔다. 땅은 그때나 지금이나 광주석산학원의 소유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점유해서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이듬해 1966년 12월에 제일여고 자리에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가 이전해 왔다. 그 학교는 선후배 규율이 무척 강했다. 학생들이 걸핏하면 오리걸음으로 가게 앞길을 기어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일까 아리랑고개라는 이름 외에도 ‘눈물고개’라는 애칭이 있으니까. 그 오솔길은 이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포장상태로 바뀌었다.
 
박광팔은 유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 초반부터 시내 식당일도 하고, 성모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담당하는 보조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어머니가 1960년대 후반 갑자기 쓰러졌을 때 윤귀옥 원장이 간호사를 한명 대동하고 한여름 산길을 넘어 집에 왕진하기도 했다. 당시, 온금동 고개 위의 집들은 ‘집이라고 할 수 없는 헛간 수준’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가게를 맡았지만, 1970년대 박광팔이 가정을 꾸린 뒤로는 직접 ‘부광’상회 간판을 걸고 운영했다.
 
“그땐 부광상회가 상당히 잘 나갔지라. 여가 공기 좋고 그 생닭 잡아주면 발 쪼사 주면 소주 먹는 맛으로 멀리서 왔는디... 어느날 식품허가 없이 촌닭을 판다고 위생법에 걸려가지고 벌금만 102만원 나왔데요. 그것이 95년, 6년 될거예요. 그래서 치워 부렀지라.”(박광팔)
자살, 화재 지킴이

그는 아리랑고개를 지키면서 수많은 사건과 사연들을 겪었다. 유달산에서 마지막 삶을 마치겠다는 장년의 남자를 만나 설득해 소주 한잔 사주면서 위로한 일이나 실제 자살로 삶을 마감한 현장을 찾아 경찰에게 인계한 일까지. 특히 2016년 2월에는 92세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신고해 귀한 목숨을 살린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해상케이블카 건설 문제로 동네가 떠들썩했다. 케이블이 동네 위로 지나다보니 로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나고 ‘불안’하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그는 ‘지역발전에 도움이 된다니 우리가 조금 참자’고 주민들을 설득하며 말렸다. 다만, 공사하던 차량이나 인부들이 아리랑고개를 이용하며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현장소장을 통해 강하게 제기하기도 했다.

박광팔은 2010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도 가게운영에 매진하고 있다. 손님이라야 아리랑고개를 통해 유달산에 오르내리는 몇 명 뿐이다. 그래도 오랜 인연을 잊지 않고 찾는 시민들 때문에 문을 닫지 못하고 있다. 이제 추석을 맞아 벌초도 하고 가족들을 기다리는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외할아버지 산소를 제가 관리하죠. 예초기 없이 낫으로만 벌초해요. 부모님들의 산소는 무섭지는 않아요. 편해요. 소주 2병, 과자 하나. 가지고 가서 다 비어 논 다음에 술 따르고 한잔 마시고 오지요. 이제 추석에 자녀들이 오는데 이 방에서 같이 잔적이 없어요. 저기 지붕이 무너지려고 하니까 기둥을 댔잖아요? 제발 증개축은 못해도 내부만큼은 수리해서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가족들과 같이 잘 수도 있고 같이 웃고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박광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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