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육지면 발상 기념사업 “‘제2의 문익점’ 미화 부적절”
상태바
목포 육지면 발상 기념사업 “‘제2의 문익점’ 미화 부적절”
  • 김영준
  • 승인 2019.10.02 0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와카마쓰 도사부로, 육지면 고하도서 첫 재배
1902년부터 4년간 목포 일본영사로 근무 조선인 탄압 앞장
[목포시민신문=김영준기자] 일제강점기 당시, 목포에 목화를 첫 보급한 와카마쓰 도사부로(1869~1953)를 ‘제2의 문익점’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개항 후 목포 일본영사관에서 1902년 7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영사로 근무했고 1904년 미국산 육지면을 고하도에 시험한 후 각지에 보급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후 목포항은 면화 수탈의 대
1902년부터 4년간 목포 일본영사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조선을 전쟁물자병참기지화 차원으로 육지면을 들여와 첫 재배을 시행한 와카마쓰 도사부.
1902년부터 4년간 목포 일본영사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조선을 전쟁물자병참기지화 차원으로 육지면을 들여와 첫 재배을 시행한 와카마쓰 도사부.

표적인 항구가 되었다.

목포대 최성환 교수(사학과)는 “최근 들어 와카마쓰 도사부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글들이 자주 등장한다”며 “와카마쓰의 평전을 쓴 어떤 분은 ‘착한 일본인’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면화 신품종을 한국에 공급한 공로자라고 호평한다고 있다”고 밝힌다. “심지어 최근 기사에는 ‘제2의 문익점’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며 “육지면 보급은 식민지 지배정책과 밀접하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최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1903년 목포부두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날 때, 야쿠자들이 무안감리서를 습격하여 우리 경찰들을 구타하고 자신들의 심복들을 감옥에서 빼 나가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을 비호 한 인물이 당시 목포 일본영사도 와카마쓰였다.

1903년 9월 15일 목포 부두에서 지게꾼으로 날품팔이 생활을 하던 김인배라는 분이 배고픔을 못 이겨, 조선인의 양곡장에서 쌀을 몇 주먹 훔쳤다. 그걸 후지카와라는 작자가 보고, 자기 쌀도 아니었는데 김인배를 마구 구타하여 즉사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이를 본 증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일본영사는 자국의 의사를 동원하여 사인을 분석한 결과 영양실조로 병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폭행했으면 맞아서 죽을 지경이 되었을까, 이런 비양심적인 사람, 오직 일본인 옹호에 앞장섰던 당시 목포 일본영사가 와카마쓰 도사부로”라며 “그런 자를 육지면을 한국에 보급한 은인이고, 제2의 문익점이라고 칭송하다니, 정말 기가 막힌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 육지면 발상지비’가 고하도에 있다. 이 비는 고하도가 육지면 재배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에 건립된 것이다. 앞면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 “1904년에 목포 일본영사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에 의해 고하도에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87cm, 너비 62cm, 두께 33cm이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팽개쳐뒀던 것을 목포시가 2008년에 다시 세웠다. 목포시 문화유산 제6호이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