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라이더 1세대 이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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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라이더 1세대 이보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10.3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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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단성사 엄마의 도움으로 생존한 목포꼬마들
안전하게 바이크 타면서 51년간 라이딩 즐겨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기자] 이보연(1936년생. 84)은 나주 출신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로 목포로 와 산정동에서 자랐다. 산정초교 13회 졸업생이다. 1951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두 명과 서울로 가출했다. 그곳에서는 배 안 굶고 공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용산역까지 무려 12시간이나 걸렸다.

서니(셋이) 도망간 날이 양력 48일인데 그날 물팍(무릎)이 넘게 눈이 왔어. 그때는 3, 4월에도 굉장히 추웠어. 목포역에서 도둑차를 탄 것이제. 석탄으로 가는 기찬디 바닥이 판자로 돼가지고 거기로 들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찬지. 우리는 의자가 등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 들어가 숨었지. 낸중(나중)에 사람소리가 난께 손님들이 본께 오매오매 아새끼(아이)들이 서니나 거기에 있은께...”

몰래 기차를 탄 아이들을 객실의 어른들이 동정하며 보리차와 김밥 등을 사다가 밑에 넣어주었다. 드디어 서울. 누군가 서울역에 내리면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해 미리 용산역에 내렸다. 어른들이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을 때라 용캐 엄마들 보퉁이를 하나씩 받아들거나, 치마나 두루마기에 휩싸인 채 무사히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모두가 한 가족같이 아이들의 처지를 안쓰럽게 봐준 탓이다.

서울서 얼어 죽은 친구

하지만 전쟁을 겪은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다. 안타깝게도 서울 도착 4일째 친구 하나를 잃고 만다. 동사凍死였다. 그날은 영하 18~20도의 혹한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싸늘한 그 공기. 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이들 셋이 서로 껴안고 앉아 잠을 잤는데 새벽에 하는 소리에 놀라 깼다.

친구가 죽어 분 날이 11일날이여. 서울 가서 나흘 만에 바로 죽었어.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둘르고 머리를 맞대고 하는 것이 워느니(훨씬) 따뜻하드만. 그랬는데 자다가 쿵, 뭔 맷독 떨어지는 소리가 나. 보니까 얼어서 앞으로 떨어진거야. 워매 워매... 그놈을 진땀 흘려서 매고 70년 전 청량리는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어. 거기 논꼬랑에 친구를 묻고 오는데...”

그 추위에도 무섭고 긴장이 되어 엄청난 땀을 흘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00원짜리 지폐에 나와 있는 남대문을 어찌어찌 찾아갔더니 꿀꿀이 죽을 파는 곳이 있었다. 5원에 한그릇을 사먹을 수 있었는데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그놈을 잃어버리고 난께 앞이 깜깜해. 우리 둘이도 딱 죽게 돼 있어. 그란디 남대문시장까지 어떻게 걸어지지도 않는 걸음으로 거기를 간께 도라무통 있잖아.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솥으로 만들어 군인 피엑스에서 나오는 돼지밥을 끓여서 파는디, 그것을 먹다 보면은 담배꽁초도 나오고 그래. 그놈을 먹고 피똥을 안 싸면 살고, 피 똥 싸면 며칠 안에 죽어. 긍께 서로 똥 싸면 피가 나오는가 안나오는가 보는 거야... 오냐, 이대도 가면 우리는 산다... 허허.”

단성사엄마는 우리를 구해준 천사

5~6일 만에 처음으로 해가 따뜻하게 비추던 날. 그날도 꿀꿀이 죽을 먹고 비실비실 걷다가 후미진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다가왔다.

느그들 어디서 왔냐?”

전라도 목포에서 왔어라.”

서울에 누가 있어서 왔더냐?”

아니라. 서울에 오면 배도 안고프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왔어라. 그란디 친구 하나 잃어 부렀어요.”

뭣을 잃었다는 말이냐?”

자초지종을 들은 그 아줌마의 눈에 이 두 아이도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정성껏 보살폈다. 그가 바로 1907년 한국 최초의 설립된 상설영화관 단성사의 안주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엄마는 이 하늘 아래 있을란가 몰라. 두부를 짜고 남은 찌꺼기 보다 비주(비지)’라고 그래요. 그것을 두가마 사가지고 왔드라고. 우릴 목욕을 시키드라고. 그러고는 가마니에 우리를 넣었어. 그러고는 느그 얼음 빠질 때까지 한 이틀만 고생해라.’ 하드라고. 그 말만 들어도 죽지 않고 살 것 같애.”

그 집에서 3개월을 보낸 뒤 용돈 500원씩을 받아서 나왔다. 그리곤 닥치는 대로 돈벌이를 하면서 악착같이 생활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달에 세 번씩은 엄마를 찾아뵈었다. 그 엄마의 사랑을 먹고 목포의 두 아이들은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때 이보연은 자신과 약속했다. 내가 상호를 가진 사업을 하면 그 이름은 단성사로 한다고.

바이크 1세대의 조언

11년간의 서울생활 동안 한 번도 목포에 소식을 전하지도 않고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귀향해 부모님을 뵈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그동안 부모님은 명절에도 떡 한번 해먹지 못하고 어디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만 하며 보내셨다고 했다. 불효자가따로 없었다. 이보연은 서울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선창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이미 당수(태권도)’로 단련된 체력이 있어 선창의 무수한 깡패들과 소매치기들을 제압하면서 악착같이 생계를 꾸려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1년 만에 가게를 열고 단성사란 간판을 걸었다. 서울 단성사 엄마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올해로 59년째 운영하는 낚시점이다.

1969년 우연히 오토바이에 매력을 느끼고 바이크를 타기 시작해 51년째 바이크를 타고 있다. 거짓말처럼 그동안 한 번도 넘어지거나 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참 교통법규를 준수하며 안전하게 탔다. 요즘 젊은 친구들도 규정을 잘 지키고 과속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안전하고 즐겁게 라이딩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탄 바이크만 6. 효성 스즈키 100cc로 시작해 125cc, 혼다 450cc, 발칸 900, 스즈키 1100cc로 발전했다가 야마하 로얄스타 1,300cc의 대형바이크까지 탔다. 이것은 19년 동안이나 탔는데, 올 봄 한번 아프고 나서 힘이 빠진 뒤로는 자신의 힘으로 대형바이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히 처분했다. 지금은 150cc를 타고 있다.

바이크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같이 무지막지하게 좋아한 사람이 또 있으까 싶어. 올 봄 바이크를 팔고 3개월간 너무 힘들었어. 발이 없어져 분 기분이야. 온천을 한 번도 못 갔지. 저놈(150cc) 가져오니까 오후에 유달산도 한바퀴 돌고, 영산강 하구둑도 돌고, 너무 좋아. 오늘도 온천 갈라고 자켓을 내놨어. 이제 내 나이에 스트레스 안 받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야지. 안그래?”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김경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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