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꽤 흡족한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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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꽤 흡족한 큐레이션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12.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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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살다, 읽다, 쓰다

(김연경 지음/ 민음사/ 2019919일 발행)

서점가에는 여전히 가벼운 에세이가 대세다.

사는 일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아서 일까. 그나마 가벼운 책이라도 읽는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까. 두꺼운 책, 어려워 보이는 책, 지루해 보이는 책, ‘철학이라든지 고전문학따위는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읽을 요량으로 지적 욕망을 보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쉽게 집어 들고 뒹굴 거리며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책. 비장한 각오를 해야만 시작할 수 있는 묵직한 작품. 읽기 전에 배경 지식부터 먼저 마련해가며 워밍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책.

새해에는 감히(?) 그런 책들에 도전해 하나씩 섭렵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라도 있다면, 먼저 세계 문학 리스트부터 마련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면,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작가 김연경이 쓴 살다, 읽다, 쓰다가 어쩌면 꽤 흡족한 큐레이션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좁은책 읽기에 환멸을 느낀 저자가 넓은책 읽기를 넘보며 쓴 자아성찰로 보인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고 글 쓰고 강의하며 다룬 세계 문학 80여 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발자크, 스탕달, 버지니아 울프, 안데르센, 니체, 카프카, 밀란 쿤데라, 보르헤스.

남의 사생활에 관심 많은 저자가 쓴 작가들의 전기이기도 하고, 어려운 작품을 쉽게 이해시키는 해설이기도 하며, 때로는 평범한 생활인의 소박한 독후감이기도 한 이 책의 큐레이션은 모든 책에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모범생다운 태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만큼 깐깐하다.

저자는 고백한다.

누군가에게는 하강일 수 있는 문학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으슥한 산골에서 의무 교육만 간신히 받은 농부의 장녀로 태어난 나에게는 시종일관 상승이었다.”

학교에 들어가던 일곱 살에 처음 접한 책이 질 나쁜 종이에 조잡한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가 전부였으나,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문학의 모든 형식을 갖춘 것이었음을 저자는 이제 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책을 못 읽는 경험을 통하여 저자는 사람에게 책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 실존인지 깨닫는다. 이 모든 자각들이 문학을 통해 얻은 상승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독서 편력과 신뢰할만한 서평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앞서 말한대로 새해에 읽을 책의 리스트를 뽑는데 마땅한 길잡이로 활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1장부터 7장으로 나눈 분류를 눈여겨보면 내가 읽을 책의 리스트가 어디에 몰려 있는지 저절로 확인하게 된다. 이미 읽은 책이 많다면 저자의 시각과 나의 시각을 비교해보며 읽는 재미를 느낄 것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가볍고 소소한 일상 힐링 에세이를 너무 많이 읽었다면, 2020년의 독서는 조금 거창해도 좋으리라. 숭고한 실존을 깨닫는 상승이 되길 바란다.

 

동네산책 책방지기/윤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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