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서의 교육이야기] 영원한 의장님! 시대와 민중의 스승이신 오종렬 선생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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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서의 교육이야기] 영원한 의장님! 시대와 민중의 스승이신 오종렬 선생님 영전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12.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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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신 서(전 전남도교육청 정책연구소 소장)
구신서 전 전남도교육청 정책연구소 소장
구신서 전 전남도교육청 정책연구소 소장

[목포시민신문]  

민주주의를 위해,

민족통일을위해,

참교육을 위해,

애쓰다 가신,

영원한 의장님!

백두산 호랑이의 기상!

그 형형한 눈빛과 사자후!

사자가 고요히 깊은 잠에 들면,

새끼 사자들이 뒤이어 이 땅의 통일조국을 위해 울부짖을 것!

한국민족민주운동과 진보운동의 큰 산이었던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 의장이 지난 7일 투병 중에 81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한국진보연대와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는 각계각층 원로들과 단체대표들을 중심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지도자-고 오종렬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정하였다. 서울 광화문에서 영결식, 광주 금남로에서 노제가 진행되었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 본인의 가슴에 묻었던 열사들의 곁,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그 중에서도 살아생전 가장 뜻과 일상을 같이한 민중의 벗 정광훈전 민중연대 의장 옆에 많은 이의 눈물과 결의 속에 안장되었다

고 오종렬 선생님
고 오종렬 선생님

시대의 교사 오종렬 선생은

전남 고흥 금산 섬 학교에 총각교사로 부임하여 섬의 여인 지금의 사모님을 만났다. 그 후 진도고성중, 전남고, 광주동명여중, 전남대사대부속고, 전남여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아 전교조 추진에 앞장서다가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자 초대 광주지부장을 맡았다.

당시 전남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고인은 지도부라는 이유로 구속되어 옥중에서 파면 당했고, 출소 후에 본격적으로 한국 진보운동 최전선에서 민족자주와 민주주의, 통일조국을 위해 활동해 왔다.

젊은 후배교사들에게는 따뜻한 선배의 모습으로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려 애쓰고 대중 앞에 서면 감명 깊은 연설로 교사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졌다.  

투쟁의 현장에서 민중의 교사로

1994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28개월 복역 후 출소이후에도 단 한해도 쉬지 않고 전국연합 상임의장,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의 상임공동대표,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범 대위대표, ·칠레FTA저지 범 대위공동위원장,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특히 한미FTA저지 활동으로 인해 20077월 세 번째 구속을 당한 후 통일운동과 민중운동 진영을 통합한 전선운동조직인 한국진보연대를 출범시키고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20085'미국산소고기 수입반대 국민대책회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촛불집회의 배후로 지목당해 그해 8월 구속됐다. 그의 일생에 네 번째 '옥살이'였다.

집회, 단식, 농성, 행진, 회의가 일상 이였지만 지치지 않고 농민, 노동자, 자영업, 소수자를 위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5,18민족통일학교를 세우고

20092월 출소한 고인은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을 맡으며 한국진보운동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2015년에 백기완 선생, 함세웅신부 등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 인근 담양에 ‘5·18 민족통일학교를 세웠다. 학교에 쓰여 있는 동학에서 5월로, 5월에서 통일로라는 구호가 상징적으로 설립 이념을 나타낸다. 이사장으로 재직시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이 무엇인지 공유하고자한다", "일본 식민사관에 따른 치욕스럽고 자기 부정적인 역사관을 걷어내고 배타적이지 않은 호혜평등의 민족주의를 복원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후 자라나는 세대와 이 땅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친일, 친미잔재청산 교육의 산실이 될 것이다.  

내게 준 큰 울림 동지라는 첫마디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전국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전교조 결성에 대한 정권의 탄압과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한 대량해고가 예고된 엄중한 시기여서 회의장은 다소 무거웠다. 사회자가 대의원대회 의장소개를 하였고 오 의장은 평소의 걸음대로 뚜벅뚜벅 무대 위에 올라섰다. 무대 중앙에 서서 좌중을 훑어보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였다.

무대 중앙에 놓인 회의용 탁자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잡고, 낮으나 우렁우렁한 목소리, 곧추 세운 상체, 빛을 쏘아내는 눈빛으로 한 첫마디, “동지! 동지들!” 이었다. 회의장은 순간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로 바뀌었고 나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은 전율을 느꼈다. 그 후로 선생님여러분, 회원여러분이라는 호칭에서 교육동지, 전교조동지, 노동자동지가 되었다.

어쩌면 1,500여명의 교사가 구속, 파면, 해임되고 30년 동안 많은 탄압을 견디고 합법에서 다시 비합법상태에 놓인 현재에도 전교조의 강고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그 첫마디에서 비롯된 동지성일는지도 모른다.

 

선생님과의 끊이지 않은 인연

고인은 내 고등학교 은사이다. “뒤를 돌아볼 때 고개만 돌리지 말고 온 몸을 돌려서 보라시던 일상의 말들이 생생하다. 교직에 들어와서 전교조를 세우는 시기에 선생님과 같은 분임조로 편성되어 토의를 하기도 하고 목포에 오시면 늘 나를 찾았다. 이후 전교조 사태로 선생님도 해직되고 나도 해직되었다. 이후 활동과정에서 나도 선생님도 서로에게 애틋했다.

 

내가 해직된 학교 정명여고의 제자 박승희가 전남대학교 2학년 재학 시에 경찰의 쇠파이프에 사망한 명지대 강경대 학생의 죽음에 분노하여 1991429일 교정에서 미국반대” “독재타도” “공안통치 반대 외치며 분신하였고 우리는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전남대 박승희열사라고 이름 했다.

오종렬 선생님의 제자인 나, 나의 제자 박승희의 분신 앞에 가장 깊은 슬픔을 안고 선생님은 장례위원장을 맡아 그 죽음을 숭고하게 하였다.

이후 박승희열사 아버지인 박심배 님은 그 당시 목포민주화운동의 구심인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 의장, 나는 집행위원장을, 선생님은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의장을 맡아 일하셔서 정기적인 만남을 할 수 있었다.  

2005년도에 내가 전교조 본부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1,2층은 민주노총, 3,4층은 전교조였다. 8층에는 선생님과 작고하신 정광훈 전국농민회의장님이 전국 민중연대 공동대표로 같이 사무실에 계셨다. 두 분이 숙식을 같이 하였고 많은 일상을 함께 하고 계셨으나 일정들이 겹쳐서 딱 한번 두 분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죄송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2007-8년 내가 전교조 전남지부장으로 일할 때에 선생님은 구속 중이셨다. 서울교육감 선거 관련해 서울중앙지검에 조사를 받으러 가야하는 오후 일정이 있어서 오전에 교도소로 선생님 면회를 갔더니 서울중앙지검으로 조사를 받으러갔다고 했다. 검찰에서 나를 취조하던 검사에게 아래층에 조사를 받고 있는 선생님과 잠시나마 볼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다행히 검사가 부탁을 들어줘서 내 조사실 옆 휴게실에서 포승줄에 매인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짧은 시간 나누고 다시 포승줄을 매고 검찰직원에게 팔을 낀 채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시는 뒷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고 검사는 한동안 취조를 미뤘다. 검찰에 불려나와 한 건물에서 각각 조사를 받은 스승과 제자의 기구한 인연이었다.

 

이후 나는 전남대 박승희 열사 정신 계승사업회첫 회장을 맡아 일을 했고 현재는 선생님의 아들인 오창규 후배가 수고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전남대 박승희 열사 장학재단이사장을 맡고 있고 선생님이 사비로 마련하신 ‘5.18 민족통일학교에서 장학재단행사를 자주하고 있다.

작년 말에 선생님은 내년 봄날 따뜻해지면 오래 전 근무한 진도고성중학교를 방문하고 제자도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진도 내 시골집에 하루라도 머물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이리 가시었다.  

만인의 의장님, 시대의 스승님 영면하시길

한국진보연대 관계자는 "고인은 평생을 조국의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영원한 의장님" 이라고 했다. “사상은 뿌리 깊게, 표현은 낮고 얕게, 연대는 넓디넓게, 실천은 무궁토록!” 해야 한다며 민족자주 확립, 민생민주 실현, 평화통일 성취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우리사회를 이룰 수 있는 사상이자 노선이라고 하셨던 가르침을 기억한다. 명심하겠다,

반제, 반전,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만인을 기르는 교사에서 만인을 위한 투쟁의 전사

로 이 땅에 굳건히 뜻, , 맘을 세우시었다.

큰 별은 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한다.

정광훈 의장님은 민족시인 김남주님 옆에 묻히기를 평소 소망하셨고, 오종렬 의장님은 평생의 동지 정광훈의장님 옆에 묻히길 바라셨다.

세분 나란히 또 이 땅의 미래와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걱정하고 계실까봐 걱정이다.

하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 못한 것이 하늘의 은하수만큼 많겠지만 이제 모든 일은 산자들에게 남기고 고통 없는 곳에 편안하길 빌 뿐이다.

은사님! 의장님!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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