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이철호 칼럼니스트]현대는 누가 사초(史草)를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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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이철호 칼럼니스트]현대는 누가 사초(史草)를 쓰는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12.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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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고대 그리스는 다신교인 탓에 다양한 신들이 인간들과 어우러지는 재미있는 장면들이 많다. 인간인 듯 신 같은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단지 흘러간 이야기로 그칠 뻔했다. 바로 이 신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역사로 기록한 사람이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시절 지금의 터키땅(할리카르나소스, 편의상 이오니아라고 하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오니아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탈레스, 수학의 대가인 피타고라스 등을 배출한 곳인데 문화·사상적으로 지적 호기심과 비판적 사고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헤로도투스는 구전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현장을 찾아 듣고 확인하려 했다. 기원전 480년쯤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니 소아시아 에게해 섬들, 흑해 북부 스키타이 지역, 남으로는 나일강 상류, 동으로는 바빌로니아 수사까지 당시 교통사정을 감안하면 도무지 그 노고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시간과 거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이 모든 지역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사실은 페르시아 전쟁사)’의 대부분은 세간의 이야기를 단순히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헤로도투스가 오늘날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에게해 지역 헤게모니쟁탈전을 그린 역사(페르시아전쟁사)’에 트로이목마가 나온다. 어린 시절 필자는 소년중앙을 통해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는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을 만나 진정한 역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트로이 전쟁에 관심이 많았던 슐리만은 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약 2400여년이 지나고 19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에 기록된 신들의 전쟁은 마침내 인간들의 전쟁임이 입증 되었다. 모두가 그냥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전쟁이후 30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 그리고 진실을 규명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버무려진 결과가 아니겠는가?

중국 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은 흉노에 불가피한 항복을 한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제의 미움을 사게 되어 수치스러운 궁형(생식기 제거)을 받게 된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를 쓰던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 중국 전역 특히 역사현장을 빠짐없이 몸소 확인하였다. 황제의 신임을 회복한 후 궁에 돌아와서도 저술 작업을 계속하여 끝내 역작을 완성하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화중심주의적 세계관을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치욕스러운 극형을 받고도 감내하며 글을 이어간 사마천의 역사의식과 사명감이 더 큰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요즘 종이신문을 과거에 비해 자주 보지 않는다. 시민들이 이미 빠르고 경제적인 인터넷에 익숙해진 결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천펀일률적이고 천박하기까지 한 신문들이 수두룩하다. 뉴스를 발굴하려는 열정도, 그리고 사실을 확인하려는 간절함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신문구독료가 아깝지 않겠는가? 어린 시절의 받아쓰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속보와 특종경쟁에 묻힌 기자들은 뉴스원이 주는 기사거리에 대해 팩트를 체크할 시간도, 심층기사를 써야 한다는 간절함도 없는 것일까? 신문기자가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를 쓰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도 어렵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근래 굵직한 정치사건을 비롯한 여러 기사들을 접하면서 뉴스의 가치를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기자에게는 독자라는 선생님이 벌을 준다는 걸 모를 리 없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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