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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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①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1.0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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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보름째 화선지에는 점 하나 찍히지 못했다. 대청마루 가운데 펼쳐진지 보름이 되었으나 여전히 화선지는 빈 종이였다. 넓게 펼쳐진 종이는 목포 앞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종이 한 장이 바다였다. 남농은 화선지 앞에서 막막했다. 바다에 나섰으나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어부의 심정이었다.

남농은 두 손바닥으로 종이를 다시 반듯하게 폈다. 백색의 화선지를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수많은 주제와 구도들이 텅 비어있는 종이 위로 오갔다. 조부와 부친의 그림도 떠올랐고 소년 시절부터 그렸던 그림들도 스쳐지나갔다. 조부인 소치와 선친인 미산의 그림은 이 땅의 풍경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산과 계곡에 앉아있는 노인들 역시도 이 땅의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남농은 눈에 힘을 주었다. 여태 그리고 보아왔던 그림과 다를 것 없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될 것이었다. 이전의 그림들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새롭게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앞에 그린 그림을 뛰어넘었다. 그러니 대청마루에 펼쳐놓은 화선지에는 더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할 터였다. 선전에 당선된 그림들은 해마다 이전의 그림과 다른 경지를 보였다. 농담의 기법과 구도가 이전의 그림을 대담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한숨이 겨우 넘어와서 화선지 위에 깔렸다. 떠오르지 않는 그림을 억지로 떠올리려 한다 해서 그려질 그림이 아니었다. 남농은 화선지 위에서 허리를 폈다. 바닷가에 산책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봄이 오니 바다가 고왔다. 거기에 낙조라도 질라치면 서른일곱 사내의 가슴이 까닭 없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허리를 펴는 남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체의 무게가 무릎에 실리면서 머리끝까지 통증이 단숨에 치고 올랐다. 남농은 눈을 꼭 감고 통증을 목울대 깊숙이 삼켰다.

-!”

스물여덟부터 시작된 골습(骨濕)이었다. 골습을 앓게 되면서 무엇보다 걸음이 불편해졌다. 앉았다 일어날 때는 앞 이빨을 아랫입술에 깊게 박아야 했다. 그런 골습은 신기하게도 화선지를 가까이 마주할 적이면 통증이 멀어졌다. 남농은 그림이 통증을 멀리 밀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집중력이었다. 남농의 신음소리를 부엌에서 나오던 아내가 듣고 돌아보았다.

저 놈의 그림은 또 어느 세월에 다 그릴 것인지……. 허구한 날 빈 종이만 쳐다보다 바다로 나가니 원.”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남농이 들으라는 혼잣말이었다. 불편한 무릎으로 또 바다에 가느냐는 타박이기도 했다. 남농은 아내를 보았다. 하지만 생각을 찾으러 산책을 나간다는 말을 할 새는 없었다. 아내는 벌써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끼니거리를 구하러 가는 길일 터였다. 가난한 화가를 만나서 종종 남농을 찾는 손님 치다꺼리에 끼니거리까지 궁리해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은 그림자마저도 앙상하게 길었다. 남농은 아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타박은 아내가 삶을 견디는 방식일 터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가난을 통째로 껴안고 사는 일이었다. 화가의 가난은 골습과 같았다. 그런 화가를 따라 살겠다고 날마다 고단하게 종종거리는 아내는 그림자마저 가여웠다.

<다음호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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