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오거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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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오거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1.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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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상하이 중간 기착지, 직물‧소금‧곡류의 수탈 거점
목포부와 목포항 인근, 계획적인 일본인들 집단거주지 도시개발
1990년대 중반까지 목포의 중심지였던 오거리

[목포시민신문=김대호 시민기자] 목포오거리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남서남부지역의 사회문화경제적 거점으로서 황금기를 구가해 왔다. 1950~1980년대 다방갤러리와 주점을 중심으로 문인, 화가, 사진작가, 음악인들이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정치인, 상공인, 시민사회 등도 이곳을 주요 활동공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오거리에 출입한다는 것은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포항은 1897년 대한제국이 개항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식민지 경제체제를 위한 무역항으로서 일제가 본격 개발되게 된다. 목포오거리는 목포항의 배후 중심상업지역으로 태동하여 1914년 목포~대전 간 호남선 철도개통과 함께 발전기를 거쳤으며 19501990년대 중반까지 목포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8971016일 대한제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이 체결되면서 그 해 1026일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00년 새로 지은 일본영사관은 1905년 일사늑약 이후 목포이사청으로, 1910년 한일합방이후 목포부가 되었다.

구 목포일본영사관은 해방 후에 목포시청으로, 1974년 시립도서관으로, 1990년 목포문화원으로 2015년 목포근현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포항은 지정학적으로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 사이의 중간 기착지이자 직물과 소금, 곡류의 수탈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 조성이 필요했고 목포부와 목포항 인근에 대한 계획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한다.

목포오거리는 목포부청 등 주요 공공기관과 목포항 배후 중심상업지역으로 조성되었다. 통상적으로 목포역, 국도1호선, 목포항의 직선거리에 있으며 통상적으로 목포역 인근 교통의 사통발달을 담당했던 다섯 갈래의 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 사회, 경제, 상업, 금융 등 융복합 공간을 일컫는다.

목포오거리에서 다방(茶房)은 도시의 의사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목포오거리 다방에서 차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한 사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상당히 복합적 함의를 포함하게 된다.

사실 음식과 음료는 사회적 관계와 분화유형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체계로 작용할 수 있다. 가령 서구사회에서 붉은 고기는 권력, , 생식력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으며 이를 먹는다는 것은 음식지위위계의 상층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1897년 개항당시의 목포지도
1897년 개항당시의 목포지도

홍차와 커피 사회적 관계 분화유형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

90년대까지 오거리 다방은 도시경영, 의사결정 결정적 역할

음식과 기호품들은 그 사회의 정치지형을 반영하기도 한다. 목포의 홍어의 수난사는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필자도 수년 전 오마이뉴스의 원고청탁을 받고 일베는 모르는 홍어의 품격이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하고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이들의 집중 포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사실 그 제목은 편집부가 단 것이었다.)

왕에 대한 진상품 혹은 황제에 대한 조공품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배계층은 권력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특정한 음식을 독점하기도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표상하여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래서 민츠라는 사회학자는 특정한 음식, 특정한 방식으로의 음식 소비는 단순한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이 표시이다. 특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선언적 행동이 되기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라고 했다.

예컨대 미국 진보운동의 대명사였던 히피들의 마리화나가 그랬다. 매카시로 대표되는 우경화 열풍과 다국적 담배회사들이 손을 잡고 마리화나를 중독과 환각성 강한 마약으로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더 중독성과 위해성이 강한 담배는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또한 오늘날 비건들의 채식이나 녹색운동들도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기성세대나 권력, 체제에 도전하고 비하하는데 음식의 이미지가 차용되기도 한다.

서구사회에서는 차와 커피가 그랬다.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몰락시킨 아편전쟁도 를 구입하기 위해 당시 세계화폐였던 은을 아편으로 확보하려 했던 배경이 있으며,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킨 보스턴티사건도 역시 차의 음용을 둘러싼 분쟁에서 기인하였다.

서구사회의 경우를 보면 당시 차문화를 독점했던 절대왕정과 귀족세력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신흥부르주아와 지적 엘리트들이 주류를 이루는 시민계급은 홍차 대신 각성의 음료인 커피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목포의 경우는 복잡한 이면을 가지고 있다. 다방에서 마시는 커피와 홍차는 음료로서 기능보다 전근대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서구화의 상징으로 출발했다. 주로 그러한 흐름은 한반도 전역의 문화예술 흐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목포출신의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했다. 또한 목포 오거리에서 차와 커피는 주류사회와 주류사회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치점이기도 했다.

식민지 억압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일본영사관.
식민지 억압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일본영사관.

그러나 나가사키와 상하이를 이은 중계무역을 담당하거나 직물과 소금, 곡물 생산과 관련된 일본인들의 향유하던 문화이기도 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조선의 차는 침략전쟁에 나선 일본군들의 풍토병 치료를 위한 음료의 생산기지로서 집중 조사되고 연구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의 의뢰로 조선의 차에 대한 학술조사와 현장 조사를 거쳐 조선의 차와 선을 집필한 이나바 이에이리(家入一雄)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서구사회는 공적 논의 절차를 통해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다. 이와 달리 한국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논의절차 대신 다방과 술자리를 통해 충분히 비공식적인 탐색과 교감을 나눈 후에야 실제적인 결정을 하는 이중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다방은 문화적 향유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집산지이자 소통의 공적기능을 매개해 주는 주요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특히 커피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의 모델로 여겼던 서구사회에 대한 열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고속 압축성장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빨리빨리 문화와의 공존, 다시 말해 속도와 고상함의 절충점으로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인스턴트커피와 티백녹차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 낸 것이다.(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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