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③
상태바
[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③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1.22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포시민신문] 하지만 산책도 겨우 하는 남농은 바다로 내려갈 수 없었다. 남농은 아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아낙을 넣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짐을 싣고 내리는 부두가 멀고 바닷가에 홀로 있는 아낙의 구도가 너무 밋밋해서 선전에 내기에는 약할 듯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다만 뚜렷하게 잡히지 않을 뿐이었다. 남농은 좀 더 아낙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켜보면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것이 잡힐 것 같았다. 막연한 예감이었다.

아낙은 바구니가 가득 차자 남농이 서있는 길로 올라왔다. 아낙의 시선과 남농의 시선이 봄볕 속에서 부딪쳤다. 아낙의 눈은 맑고 눈동자가 검었다. 고운 얼굴이었다. 남농은 아낙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무안해져서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아낙을 비켜가기 위해 불편한 걸음을 떼는 남농에게 아낙이 수건을 풀어서 미역을 싸주었다.

봄 미역이 제법 먹을 만합니다. 한 번 드셔보시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신다고…….”

……?”

제게도 자식이 있으니 언젠가는 선생님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해가 바뀌기 전부터 여러 번 마주쳤으나 아낙이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곱고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농은 아낙이 건네주는 미역을 받아들었다. 미역을 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낙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샛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데다 좁고 긴 길이었다. 길 양쪽으로는 밭들이 펼쳐져 있었다. 일제에 밀려난 사람들이 산자락을 파서 만든 밭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밭에 겨울을 난 보리 싹이 푸르렀다. 보리를 심지 못한 밭에는 그루터기들이 봄볕에 바짝 말라 있었다. 콩이나 조의 그루터기 같은데 봄에 감자를 심으려고 비워둔 땅인 듯 보였다. 남농은 비탈지고 돌멩이들이 굴러다니는 땅에서도 먹을 것을 심어서 거두어내는 조선인들의 삶이 눈물겨웠다. 남농은 비탈진 땅에서 일구어내는 조선인의 삶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주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느 덧 아낙은 산자락 하나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낙의 길 앞에 펼쳐진 산등성이에도 온통 밭이었다. 아낙은 집은 산자락을 두어 개 넘어서 있을 것이었다. 시야에 잡히는 집이 없으니 그럴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아낙은 바닷가에서 주운 미역과 조개로 저녁을 지을 터였다. 남농은 거친 산등성이에 뿌리를 내린 조선인의 삶이 눈부셨다. 또 다른 산자락으로 올라서는 아낙의 주위로 쏟아지는 봄볕이 환했다.

 

남농은 다시 화선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골습이 심한 무릎에서 삐꺼덕 소리가 났다. 남농은 이 무릎으로 그림을 마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골습은 해가 바뀌면서 통증이 더 깊고 무거워졌다. 그런 통증이 붓을 들면 몸 밖으로 밀려난 듯 멀어졌고 무릎은 무감각해졌다.

골습은 스물여덟에 처음 찾아왔다. 매일 같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리다보니 피가 통하지 않아서 생긴 병이었다. 겨울에는 불이 들지 않는 대청마루에서 장시간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찾아오는 이가 많고 그림을 청하는 이가 많았다. 남농은 그림을 청하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림을 청하는 사정들이 모두 딱했다. 그림을 얻어서 어딘가로 인사를 하고 청탁을 하려는 이들의 사정은 모두 고만고만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