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한국의 문예르네상스를 이끈 목포 오거리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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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한국의 문예르네상스를 이끈 목포 오거리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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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0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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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아지트, 토론장, 학습장, 갤러리 역할
인구대비 예술가 수가 가장 많은 부동의 1위 도시

[목포시민신문=김대호시민전문기자] 목포오거리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남서남부지역의 사회문화경제적 거점으로서 황금기를 구가해 왔다. 1950~1980년대 다방갤러리와 주점을 중심으로 문인, 화가, 사진작가, 음악인들이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정치인, 상공인, 시민사회 등도 이곳을 주요 활동공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당시 오거리에 출입한다는 것은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1950~1980년대 오거리다방들은 목포문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묵다방, 황실다방, 야자수다방, 초원다방, 오아시스다방, 해태다방, 새마을다방, 봉선화다방, 아담다방, 밀물다방, 나나다방 등은 작은 미술관이었으며 시화전, 출판기념회, 음악회 등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미술평론가 원동석교수는 갤러리 없던 시절에는 모두 이것(다방 전시)으로 만족이었지. 60년대 중반쯤엔 전시하려면 광주에서도 목포로 왔어. 그렇게 목포 쪽의 예술이 셌어. 의재가 첫 전시 한 곳도 목포 오거리다방이지. 시인 최하림 등이랑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올린 것도 목포 오거리 예식장 건물에서야. 60년대 초 김현 최하림 김승옥 등이 참여한 <산문시대> 동인이 예서 태어난 것도 여기가 문화예술의 출구였기 때문이지라고 전라도닷컴 인터뷰에서 목포 오거리의 어제를 말했다.

목포오거리다방은 한국의 화단문화를 이끈 화가들을 양산해 냈다. 목포는 한국화의 대가 남농 허건, 취당 장덕과 문원 문재석 등 유학파 서양화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일찍이 근대 미술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해방 이후 1946년 남농이 설립한남농미술원을 통해 아산 조방원, 도촌 신영복, 등 한국화의 거장들이 배출되는 한편 서양화가들 전남 최초의 미술동인목포미술원녹영회가 창립되었고, 특히, 1950년대 김환기와 양수아를 통해 추상미술운동의 활성화를 가져 왔다. 이후삼인전10대전등 이 지역 화가들의 그룹 활동은 목포화단 및 호남화단에 새로운 미술운동을 펼쳤으며, 전남 최초로 목포문화협회서화가협회결성과, 야우회, 탐진회등의 결성으로 호남화단의 새로운 구심점을 형성 발전시켰다.

특히 초의선사의 제자였던 소치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을 비롯해 다화(茶畵)로 일가견이 있었던 취당 장덕 등은 초기 오거리 다방문화를 이끌었었다. 또한, 1950년대 김환기, 양수아, 이중섭 등 한국추상미술의 거목들도 오거리 다방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목포오거리다방은 한국 문단의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 최초의 여류 장편 소설가인 박화성, 한국 최초의 극작가인 김우진, 극작가 차범석, 시인 김지하, 평론가 김현, 조희관, 박기동, 천승세, 최하림 등을 들 수 있다. 1930년 창간한 호남평론을 비롯해 1945년 예술문화, 1951년 갈매기와 전우, 1952년 시정신, 1960년 목포문학,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인 산문시대 등이 발간되었으며 목포지역 중고교 문학동인지 열풍을 이끌었다.

목포 전통 판소리인 서편제를 비롯해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김해송, 남진, 조미미, 이수미 등도 목포 출신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 예기조합(藝妓組合)과 권번(券番)을 통해 계승된 목포국악은 해방 후 협률사(유랑극단의 성격)와 창극단을 거쳐 1962년 목포국악협회가 발족하면서 체계적으로 전수 되었다. 소리꾼 장월중선을 비롯해 '보성 소리'의 대가인 조상현, 동편제 판소리의 거장 박봉술과 강도근 그리고 명창 신영희와 안부덕 등도 목포에 머물렀다.

목포의 무용은 일제강점기 목포 권번(券番)에서 승무와 북가락을 가르친 이대조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손자인 무형문화재 이매방에 계승하였다. 발레와 현대무용은 해방 후 일본에서 들어온 정춘애, 장영자 등을 통해 토대가 구축되었으며 클래식 발레의 홍정희, 현대무용의 최정자, 연극배우 함세덕 등을 배출하였다.

또한, 1925년 일본서커스에서 독립, 박동춘선생인 창단하여 1927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 공연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9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동춘서커스도 빠질 수 없는 자산이다.

김성호시인은 지난 시절 목포의 다방에는 목포만의 특별한 다방문화가 있었다특히 오거리 일대의 다방은 단순히 차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오거리의 다방은 수많은 문인 화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고 토론장이었고 학습장이었다. 전시장이 변변치 않던 시절에는 갤러리이기도 했다. 똑똑한 다방 마담은 큐레이터를 겸했다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여론의 집결지인 의회의 역할도 했었다.”라고 말한다.

지방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문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목포의 저력은 오늘날까지 그 맥이 이어져 온다. 그래서 목포는 국내에서 인구대비 예술가의 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부동의 1위를 지켜오고 있다.

(다음호 오거리다방의 추억 3. 목포의 친일파들글로벌 기업 된 오거리 친일자본)

김대호 시민전문기자(원광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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