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서의 교육이야기] 3.1독립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전남지역 학생투쟁
상태바
[구신서의 교육이야기] 3.1독립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전남지역 학생투쟁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5.05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교육의 태동과 발전과정(Ⅱ)

  구 신 서 (목포사회혁신 네트워크 상임대표)

[목포시민신문]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인 191931일 독립만세 운동은 우리 국민들의 열망과 높은 정치적 수준으로 이뤄낸 자랑스러운 항거이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항일 학생운동과 민족교육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먼저 광주에서 310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광주 시내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영암, 장성, 담양, 완도, 영광, 나주 등지에서 학생들 또는 교사들이 주도하여 학생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주동자가 구속되거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되는 일이 계속되었다. 수피아 여학교는 전교생이 참여하여 교사 2명과 학생 21명이 투옥되었다.

 

목포정명여학교의 4.8만세운동

목포에서는 48일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전교생과 목포상업학교 학생, 기독교인들이 태극기와 현수막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80여명이 구속되었다. 지금도 매해 목포정명여고에서는 4.8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고 있고 학교행사가 아닌 지역의 행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진도, 해남, 완도 등지에서는 그 다음해에 학생들과 청년, 지역민들의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10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난 박준채 한국학생과 후쿠다 일본학생 사이의 개인적 충돌이 발단이 되었다. 111일부터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들과 광주 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충돌하다가 113일 두 학교는 대격투를 벌였고, 독서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광주농업학교 학생까지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후 여러 학교로 확대되면서 학교는 휴교되었다. 광주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독서회 회원 절반이상이 전남 여러 곳에서 광주로 유학하여 하숙, 자취, 친지 집에서 다녔던 학생이었다. 오늘날 학생의 날을 113일로 제정한 것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다.

그 이듬해 1월 휴교가 끝나고 개학할 때까지도 200여명의 학생이 구속 상태에 있었고 일제경찰은 배후세력과 주동자를 찾아내기 위해 학생들에게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런 일들이 알려지면서 전남의 여타지역과 전국의 학생들에게 광주 구속 학생 석방이라는 공동의 투쟁 목표가 제시되었고 학생시위와 동맹휴학은 광주로부터 전남 여러 지역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목포상업학교의 동맹파업

목포에서는 19281119일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피착취 민중들이 일제히 가두시위를 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깃발을 앞세워 목포역으로 행진하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이들이 작성한 전단은 광주에서 배포된 것보다 더 강력한 호응을 일으키며, 폭압을 거부하고 직접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천만 피압박 민중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전단은 우리들의 조국을 사랑한 광주학생 남녀 수십 명은 거의 죽을 지경의 중상을 입고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다. 청년 학생 200명은 불법하게 검속되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길거리에서 시위운동을 하였으나 지배계급 광견들의 독아에 걸려들었다. 우리들은 광주 형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견디기 힘든 피와 눈물의 시위 행렬을 하는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피감금 학생 탈환, 총독폭압정치 절대 반대, 교육에 경찰 간섭 반대, 치안유지법 철폐, 언론결사집회의 자유 전취, 제국주의 전쟁 절대 반대, 식민지 해방 만세, 무산계급 해방만세 등을 주장했다.

 

나주를 비롯한 전남 전 지역에서의 학생저항

나주에서는 1127일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읍내를 행진하면서 전단을 나눠주고 시위를 전개했고 주동자 16명이 구속되었다. 나주 학생들은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아는가, 우리들이 얼마나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라는 격문을 배포했다. 이 격문에서 우리들의 무기는 단결이고 힘으로써 우리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함과 동시에 시위로써 대중의 각성을 촉진한다고 밝히면서 식민지 탄압정치 절대 반대,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획득, 관료적 교관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치안유지법에 절대 반항 등을 주장했다. 또 나주의 시위는 광주나 목포와 달리 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규모 참여했으며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많은 보통학교 학생들의 연대 투쟁의 선구가 되었다.

함평에서도 함평농잠보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고, 함평보통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1212일 함평장날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시위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12일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학생 6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강진군에서는 대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우리들 조선민족은 군국주의 자본주의 침략주의인 일본국에게 총체적 자유를 빼앗긴지 20이며, “동포 학생이 옥중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위안하는 의미에서 동맹휴학을 한다고 선언하고 118일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여수 지역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학생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여수 서정향교에서 친애하는 학생 제군이여 광주 사건에 동정하라는 제목의 격문을 몰래 만들어 1930125일 여수공립보통학교 교정에 살포했다. 곡성 옥과면의 옥과보통학교 학생들이 장날 시위를 추진하려다 발각되었고, 담양군 창평보통학교에서도 6학년 학생들이 광주 학생 시위에 대한 격문을 뿌리며 만세 시위를 시도했다.(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