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정병조는 일본인에 유달산 세 번 판 애국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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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정병조는 일본인에 유달산 세 번 판 애국자인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5.0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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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대부분 가짜뉴스, 악질 친일파로 기록돼야

[목포시민신문]

친일파로 구속되었다가 일약 국민대학교 이사장이 된 정병조

"나는 내 민족을 단 한 사람도 괴롭힌 적이 없다. 왜놈에게 유달산을 팔아먹은 게 뭐가 잘못이냐? 유달산을 일본으로 떼어가느냐?”

일본인들을 골탕 먹인 현대판 봉이 김선달로 목포에서 전설처럼 회자 되는 애국자 정병조? 그런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는 골수 친일 지주에 사기꾼일 뿐이다. 해방 후 치러진 510국회의원 선거 때 큰아들이 목포에 출마하면서 친일이력을 희석하기 위해 퍼트린 가짜뉴스 등이 사실(fact)로 굳어져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심지어 목포시의 관광안내 표지판에 버젓이 새겨져 있다.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할 목포의 왜곡된 친일사다.

패트 체크 1. 내 민족을 단 한 사람도 괴롭힌 적 없다?

가짜뉴스다. 친일 지주 맞다. 정병조(1897~1970217)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모리다 상점 점원 출신으로 구한말부터 부동산 투기와 사기행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동양물산 사장과 목포제빙 취제역으로 있으면서 목포 부회에 참여했다. 일제하 농토침탈 사건인 나주 궁상면 농민들이 토지항쟁을 해결하겠다고 농민들에게 경비를 받아 일본으로 가 그 돈으로 이 또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배정자를 구워삶아 의남매를 맺은 인물이다. 처음부터 해결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배정자의 도움으로 300년을 이어 온 하의도 농민들의 토지항쟁을 짓밟고 그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러한 인연으로 일본인 관료들과 인연을 맺고 목포 연동과 뒷개 쪽 간척 사업권을 따내 8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부호로 벼락부자가 된다.

산정동 자택에 세워져 있는 ‘巨山 處士 鄭炳朝氏永世不忘碑’

패트 체크 2. 유달산을 일본인들에게 3번 팔아먹었다?

가짜뉴스다. 실패한 사기극일 뿐이다. 지금은 간척된 유달산과 뒷개 주변 습지나 비간척지의 무연고 땅에 자기 이름을 새겨 묻고, 말목을 박아 일본인들에게 자기 땅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벌인 실패한 사기 사건이다.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을 그뿐만 아니라 수법이 워낙 유치하여 웃음거리가 된 사기 사건으로 유달산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패트 체크 3. 국민대학을 세우는 등 교육계몽운동에 이바지했다.

일부 팩트. 헤방이 되면서 일제에 기생해 호의호식하던 정병조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고 목포교도소에 구속돼 생명을 부지하고 재산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한 민족 자강에 관심이 있었던 신익희 선생에게 줄을 댔으며, 후일 자금을 대 국민대학 이사장(1952~1955)이 되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러나 후일 반민특위가 해산되자 금세 본색을 드러내는데, 소송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전부 되찾아간 파렴치범이다. 신익희 선생이 직접 쓴 유달산 유선각 현판은 이런 인연으로 새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패트 체크 4. 금명함을 가지고 조선총독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일부 팩트. 정병조의 사기행각이 널리 알려지면서, 더는 말발이 안 서고, 견제하는 사람들이 늘어 고립무원이 되었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조선 총독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금으로 만든 명함을 비서실에 놓고 오는 이벤트로 관심을 끌어 총독과의 면담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배정자의 의동생이며, 일본 고위 관료들과 줄이 닿아 있는 양 총독의 관심을 끌었다. 1926년 총독이 목포에서 열린 물산공진회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목포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총독과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해 마치 오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속여, 견제하던 이들에게 각종 청탁을 받는 등 사기 인생을 이어갔다. 그 사기행각은 해방정국에도 이어졌으니 대단한 배포를 가진 인물 임은 분명하다. 또한, 1970년 73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니, 전두환과 함께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망신을)산다.’라는 것을 몸소 증명한 사례라 할 수 있을 듯.

왜곡된 역사는 때론 팩트로 변질해 기록되기도 한다.

목포지역 대표적 친일파는 호남은행(현 목포문화원)을 설립한 현준호다. 1899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현기봉의 뒤를 이어 전남도 평의회의원과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그 배경으로 일제로부터 영암군 서호면 일대 12의 간척권을 따내 학파농장을 만들었는데 암태도와 더불어 전남지역 대표적인 소작쟁의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제가 만든 시국대책조사위원회 97명 중 11명의 조선인 위원에 임명돼 전국을 돌며 일제에 협력하라는 시국 강연을 했다. 특히 그는 일제가 일제 협력 공로자들을 기록한 조선공로자연감에 기록된 353명의 대표 친일파들과 이름을 함께하게 된다. 해방 이후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글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자택에서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당한다. 현준호는 최근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는데 그 손녀딸이 현재 현대그룹 현정은회장이다.

현준호의 최측근 경남 산청 출신 김신석 역시 중추원 참의까지 역임하는데 조선 유림을 전쟁협력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43징병제시행에 감격하는 모임을 계획하고, 1944<경성일보>"조선의 부형들은 어린 딸을 여자 정신대로 안심하고 보내라"라는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1959년 독립운동가 조봉암선생을 사형시키고 4.19 시위자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그의 사위 홍진기 또한 일제하 경성지법 판사로 재직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홍석현 중앙일보사장과 삼성미술관 홍라희 전 관장의 아버지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외할아버지다.

구한말의 유학자로 진도에서 12년간의 유배 생활을 했던 무정 정만조는 훗날 변신, 16인의 대표 친일파로 명성을 날린다. 그는 목포 유달산의 이름을 놋쇠 유()에서 선비 유()자로 바꿔 유달산(儒達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의제 허백련의 스승으로 남농 허건의 호까지 지어주는 등 전남 서남권의 유학과 남종화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유배 도중 목포지역에 자주 나와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목포시사 창립회원으로 우국충정을 노래한 상량문을 써서 많은 추앙을 받던 자였다. 그러나 한일 강제병합 이후 변절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조선사편수회 위원, 성균관 대신 일제가 새로 구성한 경학원 대제학, 명륜학원 총재 등을 역임하게 된다. 특히 일제가 편찬한 이왕가실록(李王家實錄) 편찬위원으로 고종실록순종실록을 편찬해 역사 왜곡에 선두주자로 역할을 했다. 조선이라는 국명 대신 이씨왕조라는 일본식 국명을 전파 시킨 일등 공신이다.

목포 출신 연극인 함세덕(19151950)도 친일파다. 1936년 단막희곡 산허구리로 등단해 대표적인 친일 연극인 유치진과 함께 어용단체인 현대극장 창단에 가담했다. 작품 황해등을 통해 일제의 지원병제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나당전쟁 시 왜의 역할을 강조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간사장을 역임했다.

<다음 호에는 일본명 오카 란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노래인가?’>

김대호시민기자(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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