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서의 교육이야기] 광주 학생운동의 미 군정기의 전남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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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서의 교육이야기] 광주 학생운동의 미 군정기의 전남교육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5.2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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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교육의 태동과 발전과정(Ⅲ)

구 신 서 (전남도교육청 정책기획자문관)

[목포시민신문] 목포의 정명여학교에서는 19302월 광주 학생들에 대한 동조 투쟁을 시도했다. 이들은 등사판을 구하지 못해 수백 장의 격문을 일일이 써서 준비하고 시위를 벌이려 했는데 사전에 이를 탐지한 미국인 교장이 목포경찰서에 신고하여 주모자들이 구속되었다.

12월부터 시위는 서울로 확산되었다. 122일부터 격문이 서울시내 각 학교에 배포되었고 5일부터 동맹휴학이 진행되었다. 129일부터는 학생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연합시위를 벌였으며, 125일부터 16일까지 30개 학교에서 12천여 명의 학생이 동맹휴학과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1,400여명이 검거되었다. 19301월에는 서울에서 2차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전국 각지로 동맹휴학과 시위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251개교, 해외까지 포함하면 281개교가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지역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민족 문제를 쟁점화 시키는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또한 전남 지역에서는 광주, 나주, 목포, 여수 등 주요 도시는 물론 보성, 강진, 곡성, 함평 등의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민족적 투쟁에 동참하여 가히 전남 전체가 함께한 투쟁이었다. 3·1 운동 이후 10년 만에 일어난 이 대규모의 학생 투쟁은 민족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강하게 보여준 사건이고 이것을 경험한 학생들은 30년대 활발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최연소 항일지사 여수 주재연 열사

그 후로도 여수 출신 주재연(朱在年, 19291944)열사는 194392314세 때 전남 여수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전파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복역 중 일제 경찰이 어린 나이에 단독으로 범행했을 리가 없다며 배후를 추궁하면서 고문을 가해 이듬해 1월 석방된 뒤 한 달여 만에 숨졌다. 당시 재판기록(1944, 현 광주지법 순천지원)에 의하면 주 열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돕던 중 조선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에야 재판기록이 확인되면서 최연소 항일지사로 평가받고 있다. 전라남도는 이에 따라 여수시와 협의해 가칭 소년지사 주재연 현창(顯彰)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연소 항일운동에 대한 정확한 사실과 역사적 평가작업을 통해 유관순 열사와 버금가는 현창(顯彰)사업을 벌이기로 했으나 아직 결실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미 군정기의 전남교육

해방이후 미 군정청은 교육의 현안문제와 인사 등에 대해 심의·결정하는 조선교육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에는 교육계 및 학계 인사 100명으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를 출범시키며 우리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채택하였다. 수업연한은 초등학교 6, 중등과 3, 고등과 3, 사범학교는 중등과 졸업 후 3, 대학은 고등과 졸업 후 4년으로 하여 1946년부터 적용하였다. 또한 종래의 3학기제를 2학기제로 운영하고 의무교육을 전면 실현하기 위해 1948년 국민학교의 수업료를 폐지하였다. 해방 후, 취학열기가 고조되어 국민학교의 학생입학이 급증하였고, 학급당 학생 수를 60명으로 하였음에도 수용이 어려워 오전·오후 2부제 수업이 진행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교원들이 물러났다.

그동안 교과목에 없었던 국어, 국사과목은 담당 교사 자체가 없어 교원부족사태가 심각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단기간에 교사를 양성하고 임용체제를 갖추어 해방시기에 2만 명이 채 안된 교원 수는 3년 만에 4만 명을 넘어섰다. 전남도 전국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전남의 교육행정은 전남 내무국 산하의 학무과에서 담당하였다. 전라남도 초대 학무과장은 유찬식이었고 9월 중으로 도내 전 국민학교를 개교할 것을 시·군 학무과에 시달하였다.

미 군정기 때 전남에서 추진되었던 주요 교육 사업을 보면, 1945년 해방된 해에는 일제잔재 청산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주화와 건국이념의 함양이 주로 이뤄졌다. 1946년에는 학교운영과 교과지도 등 행정과 제도의 측면이 중점적으로 진행되었고 1947년에는 학교학급경영과 보통교육의 강화 등 학교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교육지표가 설정되었다.

 

폭발적인 교육열기와 학생증가

1945년 해방 당시 전남의 국민학교는 공립 588개교, 사립 12개교로 600개교였으며, 학생 27만 명에 교원이 3,500여명에 이르러 지금보다 학생 수가 더 많았다.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전국 평균 70여명이었지만 전남은 77명에 육박했다. 사립학교는 교원부족이 더욱 심각해 교사 1인당 175여명을 가르치기도 했다. 학교의 신설도 섬이 많은 여수시, 신안군, 진도군에서 급증하였다. 신안군의 경우 3년 동안 13개의 학교가 새로 설립되었다. 전남 중등의 경우, 194641개교에 14,500여명의 학생이었으나 1950년에는 54개교에 44,000여명에 이르렀다. 국어, 국사교사의 부족 등으로 절대 교사 수가 부족해 섬과 산간벽지에는 교원배치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신안, 진도, 완도 등 섬지역은 발령난 교사가 하루 이틀만에 사표를 내고 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섬 지역에서는 선생님 모시기모신 선생님 못가게 하기가 지역의 큰일중의 하나였다. 참고로 신입생 정원이 가장 많은 학교는 완도초급중학교로 360명이었으며, 해남초급중학교가 310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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