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서의 교육이야기] 60~70년대 교육의 양적 팽창과 산업화 과정에서의 농어촌교육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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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서의 교육이야기] 60~70년대 교육의 양적 팽창과 산업화 과정에서의 농어촌교육의 위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6.1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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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교육의 태동과 발전과정(Ⅳ)

구 신 서 (전남도교육청 정책기획 자문관)

[목포시민신문] 1950625일에 발발해 19537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31개월 동안 진행된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전반에 엄청난 손실과 폐해를 가져왔다. 사망, 부상, 이산가족의 발생 등 인적 손실 못지않게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한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인적 및 물적 손해도 손해지만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높아져 중도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세력이 성장하기 어려웠다. 경직된 사고와 이념대립으로 인해 타협과 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의 분위기가 오랫동안 가로막혀 왔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교육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베이비 붐 세대의 교육열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아남은 국민들은 본능적으로 많은 자식을 생산하여 세칭 베이비 붐 세대가 태동되었다. 그 중에서도 1958년생은 우리 역사 이래 가장 많은 100만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출생하여 ‘58년 개띠라는 상징어가 태동하였다. 많은 출생과 함께 교육에 대한 욕구도 강하게 나타나 1959년에 이미 100명중 96명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전남의 학교 수도 1968년을 기점으로 1,000개가 넘어섰다. 전남의 학급당 학생 수가 평균적으로는 58명이었고, 도시지역은 한 학급에 70여명 내외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상당수 도시나 읍지역의 학교에서 2부제 수업을 운영하였고 여학생의 취학율도 늘어났으나 1980년에야 남녀의 성비균형이 이루어졌다.

의무교육을 추진하면서 1960년대 국민학교 졸업생이 증가하면서 중학교 진학희망이 급증하였으나 학교의 여건은 희망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중학교 입학경쟁이 치열해졌다. 1960년대 초반에 118여개에 불과하던 중학교 수는 10년 만에 238여개로 2배 증가하였다. 1960년대 후반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지역 유명학교가 광주, 목포, 순천, 여수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학벌이 출세 도구로 인식되면서 입시경쟁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입시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학생 수용을 확대하기 위해 공립학교 중심으로 학교신설을 가속화시켰다.

 

70~80년대 학생 수의 폭발적 증가와 높은 진학율

전남의 경우 신설된 중학교 대부분이 농산어촌 지역의 면단위 중심이었고, 도시나 읍 지역은 남·여중학교가 따로 있었으나 면지역은 대부분 남녀공학이었다. 1960년대 초 전남의 중학생 수가 7만 명이 되지 않았으나 196910, 197320, 1980년에는 30만 명을 넘어서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결국 1980년에 남녀 모두 90% 이상이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전남 22개 시·군에서 17개 시·군이 바다와 섬을 갖고 있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도 많은 진학이 이뤄진 것은 적어도 중학교는 마쳐야 한다는 보편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는 196361개교에 불과하였으나 1980년에는 149개교로 확대되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도 80%에 육박하였고 여학생의 고등학교 진학률도 70%를 넘어섰다. 고등학교 수와 학생이 증가하면서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에도 평준화정책이 서울과 부산에 이어 광주에서도 1975년에 시행되었다. 평준화가 진행되고 대학진학이 신분상승의 도구로 여겨지면서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초기에 급증했던 실업계 고등학교가 일반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화과정에서의 농어촌 학교의 위기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에 본격화된 우리나라의 공업화와 산업화 정책으로 농어촌지역에서 도시로 향하는 이농이 급증하였다. 진학과 취업을 위한 청소년과 청년들의 도시로 향한 대이동, 생계를 위한 청장년층의 이동은 농촌지역의 학생 수 감소를 필연적으로 가져왔다.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면서 교육기회 및 교육여건의 균등화를 전제로 하는 의무교육에서 도시와 농촌의 교육격차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1970년대 국민학교 학생 수 감소가 면단위 지역에서 시작되어 학교 영세화 문제에 직면하게 된 반면에, 도시지역은 학교의 거대화, 학급당 학생 수의 과밀, 증가하는 학생문제 때문에 학교신설과 학교시설 문제가 제기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 불과 10여 년 동안에 전남 농촌지역 국민학교의 학생 수가 40%가 넘게 감소하였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국민학교와 달리 소위 베이비붐세대의 높은 중·고등학교 진학률로 인해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학급 수와 학급당 학생 수가 도시에 비해 훨씬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농어촌이 많은 전남은 산업화시기 발전전략에서 소외되었고, 다른 시도에 비해 불리하였다. 이농으로 인한 인구수 감소는 학생 수 감소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교육환경 때문에 학력격차가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섬 지역 학교설립으로 섬 중고등학교로 진학 증가

또한 전남은 도서가 많고 해안선이 길어 어업 종사인구가 많아 섬 학교가 어느 지역보다 많고, 그에 따른 교육적 문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신안군이다. 1964년에 기존의 무안군에서 육지지역은 무안군으로, 섬 지역은 신안군으로 나뉘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섬 만으로만 이루어진 군이 되었고 교육청도 나뉘어졌다. 이후 신안군에서는 섬 별로 중학교가 끊임없이 개교되었다. 학교가 없어 목포를 포함한 도시나 타 지역으로 진학했던 소수의 학생들에서 자기 섬으로 진학하게 되어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급증하였다. 고등학교의 경우 1975년에 안좌종합고등학교가 신안에서는 처음으로 개교하였다. 신안을 포함한 섬 지역은 염분 등에 의해 빨리 훼손된 학교환경, 부족한 교실, 관사환경을 포함한 교원의 열악한 근무여건, 학생 등교의 어려움, 부정기적인 배의 출항에 따른 여러 문제들로 인해 수업이나 정상적인 학사운영에 차질을 빚어왔다. 게다가 섬 지역이나 벽지오지로 발령이 난 교사의 경우 교직을 그만두거나 휴직을 하는 경우가 많아 교사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국민학교에는 학급담임이 없는 경우가 있어 2개 반 이상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고등학교의 경우 전공교사가 없어 임시로 비사범계나 양성소 등의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 교사 수가 섬지역의 경우에 절반에 육박하여 섬 교육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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