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일본명 오카 란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민족의 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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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대호 시민기자] 일본명 오카 란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민족의 노래인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6.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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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김해송, 정부 남인수, 오빠 김봉룡 모두 골수 친일파
'이난영=목포의 눈물' 무자격 논란
목포 친일파 역사 바로잡기 이뤄져야

[목포시민신문=김대호시민기자]

좌로부터) 이난영, 김해송, 남인수, 이봉룡

▲ 아침 드라마에 나올 만한 이난영의 가족사

2005년 가수 이난영의 아들 김〇〇 씨를 취재한 적 있다. 김씨는 미국에 진출한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스(이난영의 딸 영자숙자애자)와 함께 김치 깍두기라는 노래를 히트 시켰었다. 취재는 했지만 쓰진 못했다. 항간에 떠도는 풍문에 대해 사실대로 들려준 것에 대한 배려였다.

김해송, 김은하, 이난영, 남인수의 얽히고 설킨 사랑과 불륜 이야기, 그것이 대를 이어 또 얽히면서 거의 아침 드라마 같았다. 이난영의 남편인 김해송은 김은하와 불륜 관계였고, 후일 김은하는 남인수와 결혼했다. 김해송이 한국전쟁 때 친일부역자로 인민군에 끌려가 사망한 후 남인수와 이난영은 불륜 관계가 되었고, 김은하와는 이혼했다. 이난영과 남인수는 사실혼 관계였는데, 한집에서 남매로 자란 이난영 아들과 남인수의 딸이 사랑에 빠져 반대하는 부모와 인연을 끊고 결혼을 했다. 1962년 남인수가 45살 때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2년 후 이난영은 49살 나이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매체에 싣기에는 적절치 않아 생략한다.

 

조선일보 공모로 탄생한 목포의 눈물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 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10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 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백성들의 깊은 한과 울분,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난영은 해어화라는 영화에서도 나온 다방의 푸른 꿈(1939, 조명암 사, 이봉룡 곡)’이라는 스윙 재즈를 불러 한국 재즈 음악을 태동시키기도 했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 노랫말을 적은 이난영 노래비가, 삼학도에는 난영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 이난영 일가의 친일행적, 침략전쟁내선일체징병정신대 옹호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 / 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 / 나라님 부르심을 함께 받들어 / 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 아 감격에 피 끓는 이천오백만 / 아 감격에 피 끓는 이천오백만

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 / 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 / 미영(米英)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 / 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 아 감격에 피 끓는 이천오백만 / 아 감격에 피 끓는 이천오백만

 

김해송과 조명암이 곡을 쓰고 남인수와 이난영이 듀엣으로 부른 이천오백만의 감격이라는 노래다. 이난영은 전장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띄우는 신춘엽서(1942, 조명암 사, 김해송 곡)라는 노래도 불렀다.

이난영・남인수가 부르고, 김해송이 곡을 쓴 ‘이천오백만의 함성’ 앨범

그 외에도 강남 나팔수(1942, 조명암 사, 김해송 곡), 낭자일기(1942, 조명암 사, 박시춘 곡), 병원선(조명암 사, 박시춘 곡), 혈서지원(1943, 조명암 사, 박시춘 곡), 내선일체를 주장한 친일영화 주제곡인 그대와 나(1941, 조명암 사, 김해송 곡)’의 주제곡 등 김해송과 남인수가 짓고 부른 친일노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를 만들어 히트시킨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은 최병호가 부른 벽오동(1942, 조명암 사), 장세정이 부른 단심옥심(1943, 조명암 작) 등 친일작곡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에 대한 징병과 정신대를 옹호하였으며, 내선일체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단죄되어 이난영의 남편, 정부, 오빠는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난영은 보류되었으나 앞으로 재평가의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이 박쥐의 인생을 산 남인수다. 남인수는 광복 이후 여순사건 때 좌익의 편을 들어 한국 최초의 금지곡인 여수야화(麗水夜話)를 불렀으며, 419혁명 때는 님의 통곡을 불렀다. 1962년 사망하지 않았다면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이난영그리고 해태타이거즈, 보해소주, 목포의 눈물, 김대중

결론적으로 이난영은 식민지 시대의 한과 설움을 노래한 적도, 독재에 저항한 적도 없다. 오히려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수혜자였다.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거나, 다른 사물로부터 받은 느낌을 직접 받아들여 대상과 자신이 서로 통한다고 느끼는 일을 가리켜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고 한다. 목포의 눈물은 '호남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고, 목포 출신 김대중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시퍼렇던 군사독재도 무등경기장에 울리는 목포의 눈물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찌하지 못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박해받은 호남사람들과 향우들의 한과 설움이 감정이입 돼 목포의 눈물이 사랑받은 것이다. 이난영이 그 혜택을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재평가되고, 단죄되어야 할 논란거리들이 많다. 해태 타이거즈와 보해소주, 목포의 눈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할 자격이 없다.

마케팅 용어 중에 브랜드 포지셔닝(Brand Position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선입관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작업을 말한다. 난영가요제 등 목포시의 이난영 기념사업들이 염려되는 지점이다. 목포가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어야 하나 이난영의 성지가 돼서는 안된다. 최근 근현대역사유적을 바탕으로 한 도시재생 사업과 함께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친일행위자들에 마케팅이 우후죽순 이뤄지고 있다. 목포 출신 친일파들에 대한 역사 바로잡기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친일친나치 부역자인 안익태가 곡을 쓴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친일친나치 이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제 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와 이난영을 분리해서 재평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난영의 딸들이 만든 한국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스

 

김대호 시민기자/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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