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서점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이주의 책]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올드걸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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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이주의 책]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올드걸의 시집"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6.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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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은유
● 출판사 : 서해문집
● 발행일 : 2020년 6월 5일

[목포시민신문]

이 책은 단순하게는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 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 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 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 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 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 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요란한 삶이고 빈 수레다.”

서문의 일부다. 마치 파란만장 곡진한 인생사를 담은 한 여인의 회고록일 것 같지만, 이 책은 어쩌면 평범한 일상이자 어쩌면 비범한 시에 다름 아니다. 저 수많은 일상의 존재인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뛰쳐 나간 곳이 시였고, 수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낼 수 없어 차라리 입을 다물 때마다 소리가 되어 준 것이 시였다. 저자는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고 표현한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글 잘 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은유의 첫 산문집.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이자 엄마이자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이다 발언을 아름답고 다정하고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은유의 팬들이 무조건 쟁여놓고 싶었으나 절판되었던 바로 그 책이다.

사연 많은 책이다. 속을 달래려고 개인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한 출판사에 의해 책이 되어 나왔고, 경영 악화로 얼마 후 출판사는 절판을 선택했다. 남은 책을 돌려 받아 쌓아두고 난감했던 저자에게 동네의 한 작은 책방에서 위탁 판매를 제안했다. 책방지기의 정성과 은유의 글을 알아보는 독자들 덕분에 책은 조금씩 팔려 나갔고, 급기야 책을 구하고 싶은 사람의 수가 남은 재고의 수를 뛰어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년 만의 복간. 은유의 글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 인간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한 여자의 분투와 수없이 무너졌던 실패의 기록이라고 고백한다. 그 분투와 무너짐과 실패를 주옥같은 시 48편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지만, 결코 시에 대한 해석이나 감상문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삶에 대한 연민과 사유로 가득한 은유의 첫 산문집이자, 스스로를 올드걸이라 정의한 은유의 시집이다. 은유의 글을 한 문장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누추한 소개글 대신 서둘러 은유를 읽을 일이다. 당분간 내게 책 추천을 의뢰하지 마시라. 무조건 이 책이다. 올드걸의 시집.

동네산책 책방지기/윤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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