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일제 강제 징집...한국전쟁 참전...질곡의 삶 짊어진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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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일제 강제 징집...한국전쟁 참전...질곡의 삶 짊어진 세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6.2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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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묻지마라 갑자생' 기대서 옹
97세 역경 속 일제말 식민지 목포 산증인
한국전쟁 후 산림경찰, 반공연맹 활동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기자]

기대서 옹(97세)의 마인계터 자택에서

기대서(奇大舒) 옹은 전남 장성 출신으로 1924년생 갑자생이니 올해로 97세다. 멀리 고봉 기대승과 노사 기정진(1798~1897), 그리고 기우만(1846~1916) 의병대장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이다. 실제로 노사 같은 분들은 서남해 연안에 많은 제자들을 두어 지금도 신안군 지도 두류단과 임자 화산단에서 후학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기선생은 장성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다닌 후 193916살에 목포에 왔다. 그가 온갖 고생을 한 것은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돈 한 푼 받지 않아도 먹을 것만 주면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때 옥단이를 여러 번 보았다.

옥단이는 물지게 안 졌어.

현재 옥단이의 캐릭터.

옛날에 물동우 이고 장사한 옥단이... 나 살아생전에 여러 번 봤지요.. 거기도 잘못된 거예요. 옥단이 그분이 꼭 옛날에는 저런 동우(옹기 항아리를 가리킴)에다 물을 받곤 했거든. 꼭 한동우를 머리에 이고 다녀요.”(기대서)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던 옥단이가 지금 옥단이 골목길 캐릭터로 만들어지면서 물지게를 진 모양으로 등장한 것을 보고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는 차범석의 희곡 옥단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차범석 선생도 어린 시절 자기 집에 다니던 옥단이를 본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희곡을 쓸 때는 물동이물지게로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연극의 현실적인 상황을 배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연유로 옥단이의 이미지는 이렇게 고착화된 것이다. 기대서 옹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

묻지마라 갑자생

일제 강점기 목포에서 어렵게 살던 그도 일본군으로 징병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란 말의 연유는 다음과 같다. 전쟁이 수세로 몰리던 일본은 1944년 이때 만 20살이던 갑자생들을 대상으로 심한 장애인이 아니면 무조건 신체검사에서 합격 판정을 내려 전장으로 끌고 갔다. 그야말로 갑자생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 돌아와도 좌우 대립의 최전선에서 목숨이 위태로웠고, 또 한국전쟁에서도 다시 징집되었으니 그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묻지마라 갑자생은 이런 모진 고생을 겪은 세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기대서 옹의 삶은 그것을 그대로 체험했다.

일제시대 (1945) 목포에서는 50명이 제주도에 가는데 단 1명만 빼고 다 합격됐어. 그래서 제주도 사람하고 엮여서 1개 중대가 됐어. 거기서 일본 교관한테 100일간 훈련 받았제. 일본인 교관이 그랬어. ‘목포 놈들은 유달산 밑에서 강직한 것을 타고 나서 아조 고약하다.’. 그래서 교관도 아조 성질이 급하고 고약한 놈으로 배치한 거여.”

제주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목포에 돌아와 19일 후 일본 본토로 입대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생마저 영장을 받아 놓은 것이 아닌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실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 난감했다. 그는 용기를 내 일본 부대를 찾아갔다.

유달초등학교 자리가 일본놈 아까쓰키 부대가 주둔해 있어서 그 부대를 찾아갔어요. 책임자보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 노인들이라 아무 활동도 못하는데 아들 둘을 한꺼번에 뽑아 가면 어떻게 하냐? 그 노인은 사람이 아니냐?” 라고 항의를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본인은 현역군인으로, 동생은 징용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일본으로 동원되는 것은 똑같았다.

방공호 파다가 해방 맞아

한참 더운 8, 입대를 앞두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방공호 공사장에 동원되어야 했다. 공사현장에는 백마를 탄 일본 군인이 점검 차 매일 한 번씩 확인하러 왔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군인은 오지 않았다. 오전 일을 마치고 쉬는데, 젊은이며 아이들이 몰려와 아저씨들 이제는 일할 필요 없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서야 유달산 노적봉을 건너 일본인 거리에 나가보니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해방이었다.

그리 가서 본께 틀림없이 일본 놈들이 경찰서 앞마당에 서서 쳐 울고 있는 놈도 있고... 그래서 3일 한나절 일하고 해방을 맞았어.”

해방 후 산림경찰과 반공연맹에서 근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산림경찰로 무안관내(신안군으로 분군되기 전)의 장산도, 지도, 도초도 등에서 근무했다. 3년 정도 근무했는데, 불합리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만두고 만다. 당시 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뱃겨 먹는 상황, 또는 곡식이 있더라도 나무를 베어야만 밥이며 난방을 할 수 있는데, 현실적인 대안 없이 그것을 금지하고 단속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발족하자 기선생은 목포에서 반공연맹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초대 조효석 지부장과 함께 활동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예향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일관 조효석(一觀 趙孝錫, 1922~1998) 선생이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여순사건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으며,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보부장, 9.28 수복 후로는 전남일보, 호남일보에서 편집부장과 주필을 역임했다. 1957년부터 목포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기대서 옹은 동년배이지만 조효석 선생을 대단한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분이 말년에 살던 달성동 집도 노구를 이끌고 직접 확인해 주시도 했다.

(김경완 시민기자/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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