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목포 목원동옥단이 골목길 지키는 귀중 슈퍼 88세 정한순 여사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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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목포 목원동옥단이 골목길 지키는 귀중 슈퍼 88세 정한순 여사의 인생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8.1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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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질곡이 만든 지긋지긋한 가난과 온 몸으로 싸우며 살았다
해방후 부친 유골 안고 귀국한 조국
한국말 못한 꿈 잃은 소녀는 외톨이
부푼 꿈 안고 온 목포 현실은 막막
억척스런 생활속 달성동 귀중슈퍼 개업
88세 정한순 여사
88세 정한순 여사

[목포시민신문] 일제강점기를 무사히 넘겼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은 또 다른 비극이었다. 목숨이 오고가던 시절이 끝나니 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 이어졌다. 이제 그 기억은 역사 저 너머로 사라져 먼 옛날이야기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이웃이 지금도 있다. 정한순(1933년생, 88) 여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떻게 그 아픔을 다 이겨내며 살았을까?’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네 민중의 삶이 다 그랬다.

강진읍 출신의 어머니와 강진 병영출신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큰딸 정한순은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쇼와하찌넹.”(소화8)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1933년이다. 그의 밑으로 동생 셋이 더 태어났을 때 철도역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열차사고로 돌아가셨다. 여덟 살이던 그와 가족은 작은아버지가 계시는 야마구치현의 오노다시(小野田市)로 이주해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공장생활을 했고, 정한순이 초등학교 6학년 여름,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 어머니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묘소에서 유골을 수습해 이불로 둘러쌌다. 귀국 여객선은 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작은 어선을 빌려 강진까지 오는데 잦은 고장과 사고로 한 달이나 걸렸다. 80리를 걸어 병영에 도착해서야 아버지를 선산에 모실 수 있었다. 일본 땅에 아버지를 모시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의지는 그렇게 강했다.

14살이 된 정한순은 우리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아니 생각과 언어 모두 일본인 그대로였다. 어린 동생들은 곧 동네아이들과 어울리며 의례 그러듯 욕설부터 배우며 한국말을 깨우쳐갔는데, 집안에만 있는 정한순은 그렇지 못했다. 18살이 되자 가난한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시집을 가야했다. 그래야 동생들이 밥이라도 한 숟갈 더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살이나 많은 남편에게 시집을 가게 됐는데, 장흥군 장평의 가난한 시댁에 도착하자 대놓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목원동 옥단이 골목길에 있는 귀중슈퍼.
목원동 옥단이 골목길에 있는 귀중슈퍼.

오매 병아리가 털도 안 벗고 시집왔네...” 우리말을 할 줄 몰랐지만,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악착같이 잘 살아갈 테니까....’라는 오기가 발동했다.

시댁에서의 시집살이는 짧았다. 1949년 결혼한 그해 10월 이불보따리와 쌀 2말만 가지고 목포로 재금 나왔다(분가). 큰시장(중앙시장)에서 병영방아간을 운영하던 사촌언니의 도움으로 달성동 반야사 옆에 방 한 칸을 얻었다. 남편은 남진네 집 방앗간에서 근무했는데, 이듬해 전쟁이 나자 친정어머니가 계신 병영으로 혼자 피난 갔다. 그래도 못내 목포에 남아 있는 남편이 걱정돼 120리를 걸어 소댕이나루터까지 왔다. 당시 나루터 일대는 해파리를 잡는 배들이 몇 척 있어 그것을 구경하다가 그 배로 일로 쪽에 넘어왔다. 일로의 한 노인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걸어 목포에 도착해 남편을 만났건만, 남편은 이런 위험한 상황에 어떻게 걸어왔느냐고 화를 내며 타박을 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1955년경 스물 세살 새댁은 아이를 등에 업고 고구마를 구워 시장에 나갔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서였는데, 내 놓기가 무섭게 억센 지게꾼들이 달라 들어 시꺼먼 손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돈도 받지 못하고 돌아와 운적도 있다. 그래도 그것이 장사의 시작이었다. 달성동 언덕빼기의 작은 집에서 세를 얻어 살면서도 구석에 돼지를 세 마리나 키웠다. 날마다 언니네 방앗간에서 돼지 밥을 가져와 키우니 남들보다 더 살찌고 보기 좋았다. 돼지는 크는 대로 팔려나가 현금이 됐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채소장사들에게 일수이자를 받으며 돈을 불려나갔다.

1964년 지금의 자리에 초가집이 있었다. 길목이 좋아 1,000만원이란 비싼 가격에 매물이 나왔는데, 언감생심 쳐다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동네 이웃 여자가 그 집을 덜컥 계약한 후 남편의 반대로 유지를 못할 상황이 됐다. 그러면서 정한순에게 상환기일을 늦춰주는 등 좋은 조건으로 사라고 권했다. 그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부족한 돈을 빌려 병영상회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병영상인의 기질을 드러내고 악착같이 장사했다. 실제로 중앙시장에는 병영이 들어간 상호가 많았고, 지역경제의 큰손들도 많았다. 그들은 병영사람들끼리 모임을 갖고 서로 협력하며 도움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허가를 내면서 상호를 임의대로 귀중슈퍼로 바꿔버린 것. 남편의 이름이 이귀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시골이나 섬 출신이 목포에 자리를 잡고 거주하면 집안 조카들이 줄줄이 그 집에 얻혀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한순은 장평의 조카들을 여럿 받아서 키웠는데, 그중에 안타깝게도 사고로 죽은 조카가 있었다. 결혼한 딸이 3년 만에 죽어버린 아픔도 있었고, 버젓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이 이혼해 어린 손자들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 나중에 재혼을 했지만 간경화로 먼저 떠난 아들.... 두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은 이미 새까맣게 타서 없어지지 않았을까...

가난한 시절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달성동에서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문과 유리를 깨드리고 물건을 가져가는가 하면, 돌아서면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왔다. 지금은 귀중슈퍼가 옥단이골목길의 주요코스에 해당된다. 인근의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목포의 포근한 인심을 보여주면 감동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상처가 많지만 신앙생활로 잘 이겨내는 정한순 여사의 인생은 그래도 아름답다.

/김경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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