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목포의 미션로드 - 127년 호남선교의 전진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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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목포의 미션로드 - 127년 호남선교의 전진기지
  • 김영준
  • 승인 2020.10.0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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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정 근처서 4명의 여학생 태극기 들고 만세”
4·8만세운동 그 중심에 선 기독교인들
개항 전 1893년 첫 복음의 씨앗 뿌려
美 선교사 유진벨-양동교회, 오웬-목포의료원, 스트레퍼-정명여학교 세워
만세운동 사진
‘목포의 3․1절’인 4․8만세운동의 중심에는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가 있었다. 사진은 근대역사관에서 만세운동 체험을 하고 있는 학생들.

[목포시민신문=김영준기자] “8일 오후 115분쯤에 목포 창평정 근처에서 별안간 4명의 야소교학교 여생도가 몰려나오며 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을 경관이 잡아 본서로 인치하였는데.”(1919411일자 매일신보) / “8일 밤에 야소교 경영의 여학교 졸업생 약 40명이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관헌이 출장하여 제지하고 주모자를 잡았다더라.”(1919412일자) 특히 20일자 기사는 금월 8일 이래로 소요사건에 관계된 남궁혁·김영주·곽우영·서화일·배치문32명은 경찰서 취조를 마치고 17일에 검사국으로 넘어왔는데, 당일은 조선인 군중이 약 1000명이나 재판소에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1919목포의 3148만세운동에 대한 당시 신문보도 내용들이다.

1919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목포에서도 20일과 48·9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48일의 이른바 ‘4·8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가 있었다. 당시 만세시위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장로 곽우영을 비롯해 집사 서기견·서화일, 정명여학교(양동교회가 세운 미션스쿨) 한문교사였던 강석봉 등 양동교회의 주요 신자들이었다.

당시 매일신보 등 기사에 따르면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기독교인들은 이날 새벽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집집마다 돌린 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가지에서 일제히 시위를 시작했다. 시가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뒤덮였고 시위에서 체포된 80여명이 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특히 양동교회 집사 서기견은 시위 현장에서 일경의 칼에 맞은 상처와 혹독한 고문 탓에 출감 직후 사망했다. 검거된 시위자 중 40명이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13년의 징역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의 ‘4·8 만세운동’, 그 중심엔 기독교인들이 서있었다.

목포에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것은 개항(1897) 4년 전인 1893, 지금으로 127년 전이다.

초기의 양동교회와 교인들 1902년 모습.

양동교회 100년사등 기록에 따르면 1893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 몇몇이 호남지역 선교기지를 낙점하기 위해 군산 무안반도 등지를 오가며 전도활동을 한 것이 이 지역 개신교 전파의 시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당시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기세에 잠시 활동을 멈췄지만 세상이 안정되면서 나주를 선교기지로 만들기 위해 유진벨(한국명:배유지)·W B 해리슨(한국명:하위렴) 목사를 파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주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이 강했던 곳. 당연히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선교사들이 나주 신앙터 건립을 위해 사들였던 부지를 팔아치우고 옮겨온 곳이 바로 목포다.

선교사들은 1897년 봄 목포시 만복동(지금의 양동) 127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미 목포에는 외지에서 이주해온 교인(변창연, 노학주, 김만실 등 20여명)들이 있었다. 이것이 목포지역에 처음 세워진 양동교회의 시작이다.

그 이듬해, 1898년 가을에는 유진벨 선교사 가족과 오웬 선교사 가족이 목포로 이사했다. 여선교사인 스트레퍼는 1899년에 합류했다. 벨은 전도사업을 했으며, 오웬은 의료 선교사업, 스트레퍼는 교육선교를 담당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일반적인 전도방법과 교육, 의료선교를 병행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이나 선교사들이 들어간 곳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광주나 전주가 양림교회, 서문교회 등 여러 교회와 기독병원, 예수병원 등의 의료기관,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등의 학교가 세워진 것 처럼, 목포도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서 양동교회 등의 교회와 오웬 선교사에 의해서 목포의료원이 세워지고 결국 1914년 프렌치 기념병원이 탄생했으며 스트레퍼 선교사에 의해 정명여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유진벨 선교사의 순수한 복음사역과 적당한 시기에 합류하게 된 오웬 선교사의 의술이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의 현장에 심자 교인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1년 만에 신자가 30여명이나 생겨났으며 1906년에는 당회를 구성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었다. 신앙의 씨앗을 뿌린 유진벨 선교사는 1905년 광주로 떠나 양동교회의 건립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양동교회 건물을 세운 것은 1909년 당회장으로 청빙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윤식명 목사. 조선인 목사가 담임 목사를 맡은 것은 당시 한국 전체에서 네번째, 호남지방에선 처음이었다. 윤 목사는 당시 돈 7천원을 들여 그 이듬해 마침내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06평 규모의 교회를 세워놓았다. 신앙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인 목사와 신자들이 직접 올려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인 것이다. 교회 본당 건물의 주춧돌과 외벽 석재들은 모두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다 썼다고 한다.

양동교회 사진
4․8만세운동의 중심지인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 전경.

1906년 양동교회는 임무옥을 장로를 임직시켜 최초의 당회를 구성했다. 200여명으로 불어난 양동교회는 초대장로의 임직과 함께 활기가 넘쳤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1907년 세례교인 105명과 평교인 400명으로 교세는 불과 4년 전에 비해 4배로 성장했다. 이무렵 교회는 사회저변으로 사업을 펼쳐나가 고등교육기관인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양동교회 정문 앞에는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86년 목포의 모든 교회가 연합해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린 후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선교기념비다.

목포지역의 기독교파는 미국의 남장로회가 주축으로 발전했다. 성결교회는 1925년부터 목포지역 선교를 시작했다. 장석초 개척전도사를 파송해 목포 북교동 성결교회를 설립했다. 일제시기에 세워진 교회는 이밖에 중앙교회 죽교리교회 온금동교회 용당리교회 연동교회 측후동교회 중앙성결교회 등이 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선교사들은 각 지역에 있는 노회와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개교회를 도우며 선교활동을 했지만 1940년에는 거의 강제적으로 철수하게 됐다.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의료시설도 선교사들의 추방으로 자연히 문을 닫게 됐다.

그러나 일제 말기 본국으로 되돌아갔던 선교사들은 광복이 되자 속속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 선교사가 오기 전 목포에서도 스스로 교회를 재정비하는 노력이 있었다. 광복 직후 목포교회의 재건에 앞장섰던 이남규 목사는 순교자 박연세 목사가 시무했던 양동교회를 재건했다. 연동교회도 닫힌 문을 열었다. 이남규 목사는 양동교회 교인과 영흥학교 출신으로 애국청년단을 조직하고 지역치안을 담당했다.

광복 직후부터 신사참배에 참여한 목회자의 처리문제나 신학의 방향 등에 대한 이론이 제기되면서 교회 분열의 징후가 나타났다. 1951년 고신, 1953년 기장, 1959년 합동이 분열됐다. 예장과 기장이 분열할 때 호남지방 대부분의 노회에서 분규가 있었다. 목포에는 1953년 예장에서 김점래 목사, 기장에서 이남규 목사가 각각 목포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회는 둘로 나누어졌다. 기장에는 양동교회 남부교회 항동교회 중앙교회 연동교회 산정동교회 등 큰 교회들이 있었다. 예장측엔 동부교회 성산교회 희성교회 함평읍교회 진도읍교회가 속했는데 대부분 농촌교회였다.

그 여파는 미션스쿨에까지 미쳤다. 예장에서는 정명학교, 기장에서는 영흥학교를 관할하게 됐다. 양동교회는 두쪽으로 나뉘어, 예장측은 양동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얼마동안 목포성경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옛날 프렌치병원 자리 옆으로 옮기고 목포지역 예장의 보루가 되었다. 기장에 남게 되었던 양동교회는 이남규 목사를 중심으로 목포지역 기장의 보루가 되었다.

시인 고 최일환 장로는 1997825일 목포선교 100주년을 맞아 지은 숨은 보화 100년에라는 시에서 목포를 한반도의 갈릴리로 비유하며 목포의 교회사를 이렇게 회상했다.수문통거리 양동언덕은/ 믿음의 겨자씨만한 것/ 짓밟히어도 죽지 않고/ 백년 긴긴 시간에/ 눈물로 가꾸었던 곳/ 뒷개에서도 꽃이 피었다/ 하당에서도 열매 맺었다

호남선교의 전진기지로 113년의 선교역사를 갖고 있는 목포. 일제시대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겨자씨만한 선교의 씨앗은 신사참배와 6·25동란, 군사독재 등 온갖 내외적 시련을 겪으며 127년이 지난 지금 목포에는 32개교단 3백여교회 5만여 신도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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