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남종화 맥 잇는 소농 조남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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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남종화 맥 잇는 소농 조남윤 화백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11.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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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기자] 소농 조남윤(1935년생. 86)남농南農 허건’(1908~1987)의 대표적인 제자이다. 남농은 그에게 소농素農이란 호를 지어주었는데, 희다는 뜻의 자가 크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농은 스스로 겸허한 마음으로 작을 로 바꾸었다. 하지만 1984년 남농이 써 준 서실 현판은 여전히 소농화실素農畵室이다.

그의 고향은 익산, 그곳에서 초··고를 졸업하고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에 진학했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설립해 운영하는 대전대학은 교수들이 모두 미국인이었다. 조남윤은 영문과에 다니며 그들과 프리토킹으로 공부했다. 1963년 졸업할 때 그를 눈여겨 본 미국인 선교사가, 본인의 안식년인 2년 후 함께 미국으로 갈 것을 권했다. 당시 미국유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엄청난 기득권을 갖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남윤이 선택한 것은 평범한 교사였다.

1962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재단은 재단설립 변경을 통해 한국 재단(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에 이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모아둔 운영기금 25만 달러를 재단 내 5개 학교(전주기전, 전주신흥, 광주수피아, 순천매산, 그리고 목포정명)에 각각 5만 달러씩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정명여중 이봉환 교장이 재단 이사장(한국명 타요한, W.A Talmage)을 찾아가 설득했다.

호남의 5개 학교 중 고등학교가 없는 곳은 목포가 유일합니다. 5만 달러씩 나누면 푼돈이 되니, 그러지 말고 25만 달러를 전액 정명여고 설립하는데 지원해 주십시요.”

이 호소를 재단이 받아들여 지원금 25만 달러로 1963년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된다. 또 재단은 대전대학 1회 졸업생(1963155명 졸업)들을 미션 스쿨에 교사로 파견했다. 조남윤이 정명여고에 추천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는 새로 설립된 학교의 영어 교사로 목포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소농은 남성고 재학시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림은 평생 그의 화두였다.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미술 교사를 겸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1960년대 중반 남농을 만나게 된다. 처음 남농은 영어교사인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것이 여전히 대우받지 못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남윤의 의지는 강했다. 그렇게 세월이 20, 소농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죽동의 남농화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소농 조남윤옹이 1984년 남농과 함께

“1940년대 북교동 셋집서 사는데 돈이 없어 불을 못 땠어요. 찬방에서 벼루도 얼고 전부다 얼었어. 그러니 동상에 걸리셨어. 차남수 외과에 갔더니 서울로 올라가십시오. 그래. 서울 갔더니 방법이 없다고 절단했어요.(194436세 때) 그때 동창생이 업고 내려왔어요. 그런 궁핍한 생활을 하셨어요. 내가 보기에는 남농은 화가 이전에 인생의 승리자로 봐요. 참 대단한 분이예요. 그런 삶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고 그리셨으니...”

이후 1954년 죽동250번지로 옮겨 그곳에서 30여년을 살면서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참때는 소전의 교사 월급이 백만원일 때 남농은 하루에 2~300만원을 벌기도 했다. 남농은 늘 이런 고민을 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는데, 목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실제 1960년대 일본에서 남농의 수석 2,500점을 전량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결국 무산되었다. 남농은 이것은 내 수석도 아니고 누구한테 팔 수석도 아니다. 나는 다만 잠시 관리할 뿐이다.”라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금액이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1980년대 그의 작품들은 물론 수석들을 모두 목포시에 기증했다. 평소 남농의 뜻이었던 것이다.

19855월 남농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남농은 죽동 화실의 책상과 가재도구들을 챙겨 그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소농이 이를 말렸다.

그 유명한 화가 고흐의 집에 나무침대 하나밖에 없지만, 유명한 장소로 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선생님 화실은 이곳 한 곳 밖에 없으니 그대로 보존하셔야 합니다.” 남농은 그의 말을 두말하지 않고 따랐다.

남농은 자식 같은 제자인 소농에게 한 가지 주문을 해 두었다. 당시 남종화가 세류에 밀려 쇠퇴하고 이를 공부하려는 제자들도 줄어들고 있기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남농기념관 옆 400평의 부지에 남농화를 부흥시킬 공간을 계획했고, 그 운영을 소농에게 의뢰했다. 이미 근대건축사무소를 통해 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1987년 남농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아들에게 남겨진 죽동화실도 누군가에게 팔리고 곧 허물어져 현재까지 빈터로 남아 있다. 이 두 가지가 소농 조남윤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죽동 남농화실이 없어졌어요. 서양화가 김암기 선생이 남농화실이 허물어지고 주차장으로 쓰인다는 말을 듣고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흥분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든 남농화실을 남겨뒀어야 하는데...”

남농화의 맥을 잇고, 남농의 듬직한 제자로서 활동해 온 소농.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하고 심사위원까지 역임한 노 작가는 여전히 남농 스승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의 회한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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