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문학상 읽기-소설 본상 조계희]아주 멀리 가는 빛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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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학상 읽기-소설 본상 조계희]아주 멀리 가는 빛②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12.1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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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아마도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흔들리고 있을 때 꾼 꿈이었을 것이다.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긴 잠 속에서 허우적댔다. 잠이 옅어질 쯤 착륙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안대를 벗었다. 코끝에서 물비린내가 흐릿하게 맡아졌다. 나는 창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멀리 불빛이 별무리처럼 일렁이는 곳은 15년 전 떠나온 서울이었다. 몇 분간 더 날던 비행기가 선회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유도등의 불빛을 따라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활주로로 내려앉은 비행기는 그대로 내달리다 차츰 속도를 줄이며 게이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창밖에 붉은 등을 양손으로 흔들며 수신호를 보내는 공항 직원이 보였다. 형광조끼를 입고 유도등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 위로 오래 전의 아버지 모습이 겹쳐졌다. 아버지도 누군가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돌아왔다. 여기서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활주로의 유도등처럼 깜박였다. 그 불빛만 따라가면 고통 없는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언니는 하나도 안 변했네. 미국물이 좋긴 좋나봐. 언니보다 내가 더 늙어 보인다.”

사촌동생 은주와 출국장 로비의 카페에 마주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주는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에둘러 말하면서 은근히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버릇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은주의 말버릇마저도 반가웠다. 은주를 보면서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몇 모금 삼키자마자 머릿속의 뿌연 막이 한 겹 걷힌 기분이었다. 커피 향 사이로 다시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엄마가 같이 나오겠다는 거 말렸어. 울 엄마는 언니라면 껌뻑하는 거 여전하잖아.”

열두 살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모 집에서 살았다. 나는 더부살이 하는 아이답게 눈치가 빨랐다. 은주는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고모와 고모부의 관심과 애정이 나에게로 향하는 기미만 보이면 재빨리 나타나 방해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크면서도 은주의 날선 모습이 피곤하기만 했다. 지방대학에 진학한 이유도 은주 때문이었다.

너도 좋아 보여. 잘 지내지?”

아직도 엄마 아빠 등골 빼먹고 살고 있어. 카페 오픈하면서 엄마한테 빌린 돈도 못 갚고 있고. 어떤 때는 내가 쓰레기 같이 느껴질 때도 있어.”

은주가 이렇게 솔직한 아이였나 싶었다.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번에 아주 귀국한 거라며? 남들은 영주권이며 시민권 못 얻어서 안달인데 언니는 참 별나다. 다 포기하고 돌아온 이유가 뭐야?”

은주에게 나의 몰락을 전시하고 싶지 않았다. 은주가 결핍 때문에 쏟아내는 독설이나 공격도, 우위에 있다고 느낄 때 슬쩍 내미는 동정도 싫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은주가 말머리를 돌렸다.

엄마가 당분간 엄마 집에서 지내래. 울 엄마의 언니 사랑은 참 한결같아. 그치?”

미안한데 호텔 예약 해놨어. 곧 살 집도 구할 거고.”

언니도 참 여전하네. 그러니 엄마가 언니랑 나랑 비교를 하지. 혜인이 좀 보고 배워라 소리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알아?”

미안하다. 너한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어.”

그런 소리 하지 마.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더 미안하지. 내가 좀 못되게 굴었어야지. 그래도 내가 태워다 주는 건 거절 안 할 거지?”

당연하지, 고마워.”

외삼촌 소식은 엄마한테 들었지? 엄마가 외삼촌한테 갔다 오면 하루를 꼬박 앓고 가게도 못나가더라고.”

-혜인아, 니 아버지 찾았단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다녔는데 목포 근방 섬에서 찾았다더라. 사람도 못 알아보고 꼴이 말이 아니더란다. 내 연락처 찾는데도 한참 걸렸단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아버지가 고모와 연락이 끊긴지 3년 만에 무연고 환자로 발견됐다는 소식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당장 출국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아동학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명치끝이 저려왔다. 후회와 자책은 늘 명치끝에 얹혀 있다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짐이 달랑 캐리어 하나네? 다른 짐들은 배로 부쳤어?”

가슴은 답답했지만 은주 덕분에 어둔 기억에서 빨리 빠져나왔다.

이게 다야. 그냥 다 정리하고 왔어.”

진짜 몸만 달랑 온 거네. 귀국하면 뭐 할 건지 계획은 있어?”

뭐든 하게 되겠지 뭐.”

언니도 많이 변했네. 지금도 언니가 다이어리를 색 볼펜으로 꼼꼼하게 정리하던 거 기억나. 강박적으로 계획적이던 사람이 무계획이라니 신선한데?”

어차피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배운 게 겨우 이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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