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문학상 읽기-소설 본상 조계희]아주 멀리 가는 빛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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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학상 읽기-소설 본상 조계희]아주 멀리 가는 빛③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12.1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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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한국말로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의 무거움이 절반은 덜어졌다. 영어로는 남편과 깊은 교감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언어 문제만은 아니었지만 그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좀 더 설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집 식구들까지 나섰던 이혼 과정에서 받은 모멸감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기억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분류하고 정리해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차는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속도계 숫자가 90을 가리키자 나는 불안해졌다. 화가 난 남편이 나를 옆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아무리 부탁을 해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영원히 삭제를 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차창 밖 난간 너머의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길게 뻗은 불빛이 바다와 하늘을 구분 짓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불빛이 바다 위를 오가고 있었다.

어둠 저편 어디에 등대가 있는 것일까. 먼 바다 쪽을 바라보았지만 어둠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빛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바다의 잔물결이 드러났다.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또다시 코끝이 간질거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향기가 코끝에서 맴 돌았다.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오래된 향기였다.

호텔에 도착해 낮은 조도의 스탠드 불빛 아래서 휴대폰 바탕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다니엘이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다니엘이 보고 싶었다. 내 품에 안길 때 정수리에서 나던 땀 냄새가 그리웠다. 아직 어떻게 해야 다니엘에게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내 앞에는 뒤엉킨 실타래 같은 미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지하철에 탄 후 어지럼증 때문에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아 눈을 떴다. 열차가 지상 구간으로 접어들어 한강을 건너고 있던 참이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낮게 떠있고 햇살을 받은 강물은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채도와 명도와 구도가 완벽한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풍경이 주는 편안함 속으로 나도 함께 스며들고 싶었다.

한 번의 환승을 거쳐 광명 역에 도착했다. 고속열차에 올라타면서도 두 시간 이십 분 후면 목포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15년 전이라면 고속버스로 반나절 이상 걸렸을 거리였다. 평일 오전 시간이어서인지 고속열차 안은 한산했다. 창밖으로는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또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한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는데도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누군가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동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멍했다. 사람들 뒤를 따라 플랫폼으로 내려서자 비로소 머리가 맑아졌다. 역 개찰구를 나서면서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자꾸 두리번거렸다.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목포역사 바깥으로 나왔다. 오래 전 엄마와 함께 이곳에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그 때문인 것 같았다. 광주에서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왔던 날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날이었다. 만약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날 아버지에게로 가는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엄마 옆에 남아있었더라면 엄마와 오빠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지도 모른다. 새삼 타임슬립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 앞에서 택시에 올라탔다. 요양원 이름을 대자 초로의 운전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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