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53년째 사진관 라이프 칼라 운영 중인 김광영 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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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53년째 사진관 라이프 칼라 운영 중인 김광영 사진사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1.2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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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인내...성실...기부...드라마 같은 인생
일본서 태어난 해방둥이...초등 졸업 후 생업 전선에
목포선창가 정착 장사...제수 출신 운영 남양병원서 X-ray기사
라이프 칼라 사진관 차려 새로운 길 모색
성실한 운영방식 사진관 경연 성공
김광영 기부천사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전문기자] 김광영(76)19455월 일본 나라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제빙회사에서 근무하실 때였다. 태어난지 3개월 만에 8.15 해방이 되고, 얼마 후 곧 일본에서 나와 아버지 고향인 나주 노안에 정착,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는 가난한 시절,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자신의 밥벌이를 해야 했다. 열 세 살이던 1957년 즈음 이모님이 목포에 계셔 그 집(사실은, 만호동 중앙성결교회 아래 방공호가 이모 집이었다.)에 빌붙어 온갖 궂은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모가 바구리 하나 들고 전매 삼바시에서... 배 뜨기 전에 시골 손님들한테 과자며 깨끼(아이스크림)를 팔았어. 거기서 발전해갖고 영해동에서 무허가로 노점상... 과자도 팔고, 고구마도 궈서 팔고, 아이스크림도 팔고 어머니랑 같이 했어.”

1960년에는 이미 부모님도 나주에서 나와 목포 선창에 정착해 함께 살았고, 좌판이지만 한곳에 정착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하나복지관 앞으로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당시 자주 찾아간 곳이 어느 선구점. 그곳에서 일하는 세 살 위의 김중관과 친구처럼 지냈는데, 집 주인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 인연으로 제주출신의 문성옥이 운영하는 남양치과에 조수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부터 인생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장사하다가 내가 남양치과 조수를 했어. 남양치과는 제주도 사람 문성옥이여. 지금 영란회집 2층에 있었어. 1층에는 중앙빵집이였어. 그라고 2년 정도 있다가... 그때가 20살 정도 되고 남양치과 자기 형 집인 남양병원으로 옮겼어.”

남농수석관에서 작업 후 인증샷(1979년)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된 그는 남양병원에서 문태옥 원장을 도와 엑스레이 기사가 되기도 하고, 수술보조원을 맡기도 하는 등 온갖 일을 맡았다.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모두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엔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자격 없이 오래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X레이 촬영 경험을 되살려 사진관을 차리게 된다. 그때가 196824살이었다.

엑스레이 찍다 보니까 사진이 괜찮겠드라고. 그래서 차 없는 거리에 라이프사를 차렸어. 가게를 얻는데가 20만원이고, 10만원 가지고 기계를 샀지. 30만원을 가지고 시작했어.”

야시카 카메라 한 대와 삼각대, 그리고 확대기만 가지고 시작한 라이프 사진관이었다. 1972년에는 지금의 상호인 라이프칼라로 변경됐다. 당시 목포에는 역사가 깊고 경륜이 많은 선배들이 쓰리세븐, 라이카, 신혼, 세계, 목포, 경제, 고향, 쌍미사, 천연당, 대영사, 미영칼라 등 여러 사진관들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후발주자인 김광영은 그때부터 사진에 현대적인 택배시스템을 도입해 혁신을 이뤄냈다. 건설회사나 관공서를 방문해 필요로 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해 직접 가져다주는 서비스였다. 당시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효과를 발휘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경제적인 안정을 갖추게 됐다.

70년대에 여학생들이 유달산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찾아오면 유선각까지 직접 올라가 찍어주는 일이 많았다. 1980년대에는 사진 인화를 전제로 카메라를 대여해 주는 일이 많았다. 1981년 영산호의 최종물막이와 같은 목포의 역사를 기록하는 현장에도 늘 그가 있었다. 심지어 하루에 1만장을 인화한 적도 있었으니 그의 손을 통해 세상에 나온 사진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된다. 그는 한때 작품사진에 전념한 적도 있었지만, 일찌감치 포기하고 생업으로서만 사진을 찍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사진으로 인연을 맺은 분들이 많지만 남농 선생과 서한태 박사가 기억난다고 했다.

남농이 수석관을 운영하며 수석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수석관에 여러 차례 불려가 수석작품을 찍어드리고 촬영비 대신 그림을 받았다. 1979년에는 소나무 두 그루를 그린 큰 작품을 받았는데 작품에 김광영이라고 씌여 있었다. 하지만 이를 팔기 위해 이름을 감촉같이 떼 낸 기억도 있다.

1983년에는 서한태 박사(환경운동가)를 도와 나주 영산포에 갔다. 당시 진로소주가 주정공장이 허가를 얻기 전에 기초공사와 주정탱크를 만든 것을 찍었던 기억도 있다. 사업허가도 전에 이런 공사를 할 정도로 기업은 허가부서인 정부를 농락할 정도의 사회적 분위기였던 셈이다. 결국 이 불법 공사현장의 사진 한 장이 주정공장 불허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53년째 사진관을 운영 중인 그에게 디지털 카메라가 가져다준 변화-기존 사진관의 몰락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진관을 운영하는 그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원로 작가이자 원도심의 어른이 된 김광영은 얼마 전 수문로의 한 건물(시가 14천만원 상당)을 목포시에 기증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그를 기부천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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