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교육·제도·전제(田制)·병제(兵制) 등 사회제도 수용 이식
경학(經學) 중심의 한대(漢代) 유교와 한사군 문물 영향 받아
신라 유·불·도 삼교 배타적 충돌 아닌 조화 이뤄 특이한 일
법제·교육·제도·전제(田制)·병제(兵制) 등 사회제도 수용 이식
경학(經學) 중심의 한대(漢代) 유교와 한사군 문물 영향 받아
신라 유·불·도 삼교 배타적 충돌 아닌 조화 이뤄 특이한 일
[목포시민신문] 삼국 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鼎立)하여 서로 침략과 공격을 치열하게 계속하면서도 한사군을 비롯한 외민족(外民族)에 대해 부단히 대립 저항함으로써 고대 사회의 토착 문화와 중국계 대륙 문화가 두 갈래의 흐름을 나타내 보인 시대이다. 따라서 삼국 상호 간의 대내적인 갈등과 한족(漢族)등 외민족에 대한 대외적인 항쟁이라는 시련을 통하여 종족의 자주 의식의 각성과 더불어 고대 국가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이전의 청동기 시대를 넘어서 철기 문화를 갖추게 되었으며, 철제 농기구를 통한 농경 생활의 발전은 고대 왕권 국가의 경제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정치 및 사회 윤리로서 중국의 유교를 습득하였고, 종교적인 면에서 불교 사상을 수용 섭취함으로써 개성적인 민족 문화를 형성 확립시켰다.
삼국 시대 한민족의 중국 문화에 대한 수용, 특히 유교 사상에 대한 수입과 소화의 양상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의 한반도에서는 선진 시기의 원시 유교를 받아들여 주로 도덕적 실천과 윤리 질서의 형성에 주목하면서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 국가를 지향해 나갔다. 그러다가 중국 북방 부족의 침략에 의해 고조선이 흔들리면서부터는 당장 남하하는 한족 세력을 막아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부국강병의 길을 추구해야만 하였고, 그에 따라 한나라의 전장 제도를 본받아 국가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에 삼국의 유교 사상은 경학(經學) 중심의 한대(漢代) 유교와 한사군 문물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삼국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삼국은 각각 자기 부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 문화를 적절히 섭취함으로써 전통적인 자주성을 발휘하는 데 활용하였으며, 사상적인 면과 더불어 법제·교육·제도·전제(田制)·병제(兵制) 등 사회 제도 전반에 걸쳐서 중국 문화의 체제를 수용하고 이식하였음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북부에 위치한 고구려는 한족으로부터 가장 드센 압력을 받으면서 성장한 만큼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인한 나라였다. 한족의 침입을 극복하기 위해 국력의 신장이 시급하였던 고구려로서는 한나라의 중앙 집권 체제와 같은 강력한 국가 조직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원시 유가의 도덕적 실천과 윤리 질서의 기반 위에서 한대의 기능적인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사기, 한서, 후한서), 문선(文選) 등 경·사·자(經·史·子)를 겸비한 지식인들을 길러 국가의 목적과 필요에 맞게 활용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유교는 다분히 한대 유교의 전장 제도에 중심을 둔 것이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잘 계승하면서 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정치이념에는 고신도적(古神道的)인 전통사상과 함께 신정적(神政的) 요소, 주술기복적(呪術祈福的) 요소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혼재하였으나, 차츰 유학 사상이 정치이념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에서의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의 소장(消長)에 대하여 말하자면, 전기에는 유교만이 성행하였으나, 중기에는 유교와 불교가 병행하였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국가에서 삼교를 모두 성행시키려 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수용되어 성행하면서 신진의 세력으로 우위를 점하자 도·불 간의 반목으로 정신계가 동요함으로써 결국 나라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었다.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강성하였던 고구려의 국운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다시 도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두 종교가 서로 반목 대립하는 와중에 쇠퇴해 버렸고, 끝내는 종교 간의 부조화로 나라가 멸망하는 불행까지 당하고 말았다.
백제는 북방에 살던 부여족의 일파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있던 제후들을 통합하여 이룬 부족 연합의 성격을 띤 나라로서, 정치의 중심이 여러 차례 남쪽으로 옮겨지는 등 매우 유동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을 차지한 백제는 지리적으로 볼 때 넓은 들과 온화한 기후조건을 갖춘, 삼국 가운데 가장 천혜의 나라였다. 도읍을 남쪽으로 옮긴 뒤에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 남방과 문물을 교류하는 동시에 미개의 상태에 있던 일본과도 접촉하는 등 당시로서는 국제 교역의 중심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족의 연합성, 도읍의 유동성, 교역의 국제성 등을 지닌 백제였기에 자연히 백제의 문화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백제의 유교 사상도 초기에는 고구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으나, 도읍을 남쪽으로 옮긴 뒤로는 중국의 남방 문화와 접촉하면서 육조(六朝)의 다양한 학술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백제는 이를 다시 신라나 일본으로 수출함으로써 은연중에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유교의 독존적 지위가 무너지고 다양한 학문이 출현하는 동시에 문학과 예술이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어, 점차 고구려나 초기의 백제와 같은 종전의 단조로운 상태에서 벗어나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유교 사상은 전장 제도와 같은 기능적인 내용에서 순수한 학술 연구로 일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본래 원시 유가가 지녔던 윤리 도덕의 보편성이나 전장 제도의 기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보편성이나 기능성의 토양 위에 학술성이 가미된 것이며, 이 점이 바로 백제 유교 사상이 지녔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백제의 유학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백제는 중국의 대륙 문화를 일찍부터 수용하여 생활화하고 토착화하는 한편 이를 충분히 섭취할 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문자와 학술을 전파하여 일본 고대 문명을 계발하고 문화국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끔 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유교와 불교를 전파하였음은 물론, 미술과 공예·음악·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오행에 이르기까지 그 전문가와 서적 기구 등을 끊이지 않고 보내주었으니, 그것이 일본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에 어떻게 공헌하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소위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문명은 백제인의 선물, 또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삼국 가운데서 문화적으로 가장 뒤늦게 발전한 신라는 한족의 충격을 비교적 덜 받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였던 까닭에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를 거쳐 간접적으로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덕분에 문화적 충격을 덜 받은 데다가 망명 지식인들을 통해 원시 유가 도덕 정신을 착실하게 습득하였기 때문에 문화의 보편성과 조화성을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신라는 이처럼 착실하게 형성된 유교적 바탕 위에서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였기에, 서로 마찰이나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유·불·도 삼교(三敎)가 회통(會通)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유교의 보편성과 현실성은 불교와 도교까지도 국가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집약·조화시킴으로써 이른바 ‘화랑도’를 탄생시켰다. 결국, 일상적인 도를 본바탕으로 하는 유교의 현실주의와 공리주의는, 다분히 출세간적(出世間的)이고 추상적인 불교를 회통하여 한민족의 통일 국가를 건설할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이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 신라의 유교 사상이 지닌 특징이다.
이때 신라가 섭취한 중국의 유교는 도의적 실천을 중시하는 선진 시대의 원시 유가 사상이었고, 도교는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노자의 자연주의와 장자의 지혜주의를 통합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도가 사상이었으며, 불교는 이미 중국화 된 천태·화엄의 사상과 순수종교적인 열반·정토·미륵의 사상이었다. 이처럼 신라가 받아들인 삼교는 모두 현실 세계에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데 아주 적합한 것들이었다. 그 결과 신라에서 유교의 실천적 도의 규범은 인간의 의의와 가치를 자각하도록 이끌었고, 도교의 정신적 자유는 생활의 낭만과 슬기를 확장시켜 주었으며, 불교의 불국정토 사상은 이상을 현세 속에서 실현시키고 구체화시키도록 이끌었다.
유·불·도 삼교가 배타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룬 경우는 신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일이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여섯 번째로 ‘원효와 화쟁 사상’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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