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예를 배우는 ‘선배’ 성곽, 도로 닦기 등 국가에 헌신
미혼의 평민 남자들 모여 교육·훈련하는 단체 경당 존재
경서와 사서 오경 가르치는 귀족 대학 제도인 태학 설치
[목포시민신문]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부터 비롯하였다. 창설한 연대는 전사(前史)에 전해지지 않으나, 조의(皂衣)라는 명칭이 〈태조본기(太祖本紀)〉에 처음 보이니, 그 창설이 태조·차대(太祖·次大) 두 왕 때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선배’는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다.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선’의 음을 취한 것이며,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신은 최고 최상의 뜻이며, 수두는 神壇 즉 신성 구역인 蘇塗를 뜻하고, 이를 관장하는 수두하느님이 곧 壇君이었다.) 교도의 보통명칭이었는데, 태조 때에 와서 매해 3월·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을 모아 칼로 춤추거나 활쏘기, 깨금질, 택견이도 하며, 얼음을 깨고 강물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 가무를 연출하여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대수렵(大狩獵)을 행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보는 등 여러 가지의 내기에서 승리한 자를 ‘선배’라 칭하였다.
‘선배’가 되면 국가에서 녹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집안 살림에 부족함이 없게 하고, ‘선배’된 자는 각기 대(隊)를 이루어 한 집에서 자며 한 자리에 먹고, 앉으면 고사(故事)나 학예(學藝)를 익히고, 나가면 산수(山水)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고 도로를 닦거나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기도 하는 등 한 몸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치 않으며, 그중에서도 성행(性行)과 학문과 기예가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며, 일반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皂帛, 검은 비단)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皂帛)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 스승 중의 우두머리가 그 전부의 ‘선배’를 모아, 스스로 일단을 조직하여 전장에 나아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전사(戰死)할 것을 작정하여, 죽어 돌아오는 자는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자와 같이 영광으로 여기며, 싸움에 지고 물러나면 침을 뱉고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가장 전장에 용감하였다. 고구려 당시에 각종의 지위를 거의 골품(骨品)으로 얻어, 미천한 자가 고위(高位)에 오르지 못하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미천에 상관없이 학문과 기예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기 때문에, 인물이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신라에서는 아름다운 용모를 중시하여 화랑(花郞)이라 하고 고구려에서는 조의(皂衣), 즉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조의선인(皂衣先人)’이라 하였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가 오히려 그 유풍(遺風)을 보전하여 촌락에 숨어들어 그 의무를 이어왔으나, ‘선배’의 명칭은 유교도(儒敎徒)의 ‘선비’에 빼앗기고, 그들이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 잘못 부르게 된 것이며, 후예가 빈곤하여 학문으로 나아가지 못해, 조상의 옛일을 날로 잊어 그 내력을 잃게 된 것이다. (『조선상고사』 인용)
우리가 특히 유가(儒家)에서의 ‘사(士)’를 ‘선비’라 칭하는 것도 바로 이 ‘선배’에서 비롯한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士)를 선비라고 할 때의 그 선비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유가의 입장에서 선진(先進)들이 언급해 놓은 것을 대략 살펴보고자 한다.
사(士)는 유학적 교양과 학식을 몸에 지닌 옛적의 지적 지배층으로 독서인이라 하기도 한다. 원래 사(士)는 일반적으로 여(女)에 대해 성년 남자의 총칭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지도적인 지위에 있는 남자에 대한 미칭으로, 사(史) 등과 더불어 관직이었던 같다. 서주, 춘추시대 제국(諸國)의 지배층은 공(公, 제후), 경(卿), 대부(大夫), 사(士)로 구성되었으며, 사(士)는 피지배층인 민(民)과 구별되었다. 이후 시대에 따라 그 의미의 변천을 거듭하면서 그 지위나 역할은 다소 다름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혹은 도덕적 수양이 있는 사람을 일컬어 오던 것이다.
묵자(墨子)는 그 나라에 들어가 보아서 선비가 없으면 망한 나라인 것을 안다고 하였다. 선비는 지성인으로 나라의 원기(元氣)이자 염매(鹽梅)이며 도의(道義)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그래서 예부터 선비를 고귀하게 여겨온 것이다.
선비의 몸가짐과 숭상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지조 등은 『예기』 유행편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그 대략을 (김충열 교수의 설을 취하여) 요약하면 첫째,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행위를 자제하며, 인격을 도야하고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고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깊고 넓은 학문을 닦아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터득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하여 사리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인류 문화에 대한 창조적 충동을 느껴 포부와 경륜을 품고, 실지로 천하의 일을 만났을 때 이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경세관(經世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학문은 선비의 천업(天業)이며, 모든 것이 그곳에서 나오는 예지의 원천이다. 그리고 선비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이 살신성인(殺身成仁), 사생취의(捨生取義) 할 수 있는 생명 정신,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정의의 편에 서서 생명을 걸고 불의를 물리치며 인간의 대도(大道)를 광정(匡正)하는 것이었다. 예부터 선비는 지절(志節)을 숭상하였고, 이것을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으뜸가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선비는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지절을 빼앗을 수는 없다 하였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는 한 국가 민족의 대의는 물론 전 인류 역사 문화의 명맥을 부식(扶植)시키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요즈음 지절(志節)은커녕, 선비 본연의 사명인 최소한의 비판 정신조차 망각한 채, 학행(學行)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으로 민국(民國)을 오도하며, 지조도 얼도 없는 썩어 문드러진 지성인, 염치를 모르고 탐욕에 찌들어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사이비 지식인, 수서양단(首鼠兩端)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에 이골이 난 어용학자 나부랭이들은 이러한 선비정신을 감계로 삼아, 민국의 원기로 사회의 소금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저러한 ‘선배’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와 다 같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민족과 국가를 위한 충의(忠義)와 희생정신, 우환의식(憂患意識)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건립하였다. 고구려의 대학 제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당시 중국의 제도는 교수인 박사를 두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특히 오경(五經)을 중요 과목으로 삼았고, 또 당시 경당(扃堂)에서의 교육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고구려의 대학 교육의 내용도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대학은 귀족자제들을 교육하는 최고의 학부였다. 그 신분 계층에 따라서 입학이 허락되고, 일반 평민들은 대학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고구려에서는 일반 귀족들이 나라의 경제·정치·국방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사회 조직이 왕과 호족 대가(大家)와 서민 하호(下戶)로 신분적 계층이 나뉘어 있어, 귀족과 평민이 그 직분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대만으로 외적을 막기에는 충분치 못하여 미혼의 평민 남자를 모아서 교육하고 훈련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를 경당이라고 불렀다. 이 미혼 청년단체는 신라의 화랑도와도 비슷한 성격을 가졌지만, 신라의 화랑은 귀족층의 단체이고, 고구려의 경당은 평민들의 단체라 할 수 있다.
《구당서》 고구려조를 보면, ‘풍속이 서적(書籍)을 사랑하고, 목축하는 천하고 가난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놓고 이를 경당(扃堂)이라 불렀는데, 미혼의 자제들이 밤낮으로 여기에 모여 독서와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그 읽는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 있고, 또 문선을 더욱 애지중지하였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고구려의 경당이라는 것은 국민 교육기관인 동시에 비상시를 대비하는 무예의 훈련소와 같은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농상에 종사하면서 문무를 겸해 닦으며 일단 유사시에는 국민이 모두 군병(軍兵)이 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고구려의 강성은 문무(文武)를 겸해 닦고 충의(忠義)와 호국(護國)의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선배’ 제도와 아울러, 저처럼 상무(尙武) 호학(好學)하는 백성을 국민 교육과 훈련을 통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로 길러낸 것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9번째로' 화랑도와 낭가사상'이 연재됩니다.
보는 견해에서는 지배층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분화한 결과를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이 견해에서는 경당의 학생이 하급의 실무관원 내지 무관으로 진출하였다고 보고, 지배층 내부에서 상층과 하층이 분화하면서 하층의 지배층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경당이 세워졌다고 이해한다.
.출처: 경당 [Gyeongdang, 扃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