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건국 이념 훈요십조엔 자립자주의 기상 엿보여
광종 과거제 통해 인재 선발·등용함으로써 유학 진흥에 기여
왕실, 팔관회 등 부도·음양·풍수·도참의 설로 나라 운영 기록
12. 고려 초기의 유학
한국유학사에서 고려 시대의 시대 구분은 흔히 성리학 수입 연대인 충렬왕 때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갈라서 고찰하되, 전기의 유학을 또 무신난 이전과 이후로 갈라서 보기도 하며, 사상적 변천 및 유자(儒者)의 학풍에 따라 고려 초기 유학을 경사유(經史儒) 시대, 중기 유학을 문학유(文學儒) 시대, 말기는 성리학(性理學) 시대로 구분하여, 경사(經史)·사장(詞章) 중심의 유학으로부터 북송 성리학의 도입을 거쳐 성리학의 수용에 이르는 세 단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신라 말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고 전제(田制)의 문란으로 민생이 어려웠고, 풍수(風水)·도참(圖讖)사상의 성행으로 사상적으로도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사상적으로 당시에 성행했던 불교·도교 및 재래의 고신도(古神道), 풍수·도참 등과 유교를 넓게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과 민심의 수습을 기하려 하였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의 여러 종파 사상을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하고 보완하려 하였다.
고려의 사상적 특징을 말하면 유·불·도 삼교와 재래의 고신도 사상이 교섭하고 융화되어 상호간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던 점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 시대의 배불숭유나 주자학 이외는 모두 이단시한 것이라든가, 삼국 시대에 있어서 유·불·도 삼교가 정립 또는 병행하는 것과도 달리 이질적인 사상들이 융해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고려 시대 전기는 당나라 학술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는 송학의 영향을 받는다. 중국에 있어서 한대(漢代)의 유학은 유교를 중심한 경학 사상이었고, 당대(唐代)의 사상은 유·불·도 삼교가 상호 교섭하는 문학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송학은 도·불을 배척하며 유교를 철학적으로 심화시켰으니, 이것이 곧 송대 성리학이다.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를 말하면 불교를 숭상하고 풍수도참설이 유행하던 시대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성리학이 전래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유학이 사회 정치적으로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어느 정도 구실을 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경우라도 전장제도나 사장(詞章) 문학과 같은 한당 유학의 조류가 학술 문화의 아류로 기능하는데 그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허구적인 도통론(道統論)에 얽매어 성리학만을 유학으로 신봉하는 편파적인 입장에서 오는 잘못이다. 유교에서는 본래 ‘공문사과(孔門四科)’라 하여 유교의 내용을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의 네 가지로 분류하여, 말과 글의 효용 또한 높이 평가하였다.
‘공문의 사과(四科)’를 비롯한 원시 유가의 효·제·충·신의 도덕 윤리, 역성혁명이나 왕도주의, 한대 유학의 경학·전장·의례, 당대 유학의 사장·풍화 등 유교의 일반적인 내용에서 보자면, 고려 시대의 유학은 단조롭고 편협했던 조선 시대의 유학에 비해서 깊이는 부족했다 하더라도 더 포괄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특히 고려의 유학은 국가와 사회의 당면 문제와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입각함으로써, 불교와 도교가 지녔던 공허함과 방탕함 그리고 백성들의 미신적 의식을 비판하고 깨우치는데 크게 기여한 합리적인 사상이었다.
훈요십조는 불교·지리풍수설·음양오행설·속신(俗信)·유학 등 잡다한 신앙과 사상이 함께 어울려 있다. 라말 최치원으로부터 유·불·도·선(仙)의 융합을 보았거니와 이제 훈요는 지리풍수·음양오행설·속신까지 겹쳐있다. 이처럼 태조의 훈요가 비록 사상적으로 잡다한 느낌이 있지만 자립자주의 기상 또한 있음을 알 수 있다.
훈요십조는 태조가 당시의 모든 사상 및 풍조를 반영시킨 것이고, 위정자로서 사상적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성을 표시한 것이며, 특히 그 제 10조에서 경사(經史)와 정치를 밀접한 관계로 여겨서 『서경』의 〈무일(無逸)〉 한 편으로써 치국자의 중요한 계명을 삼았으니, 여기에서 넉넉히 태조의 유교 정치사상의 일단을 알 수 있다.
도참설은 신라말의 승려 도선의 예언설을 말하는데, 그는 특히 풍수지리설로써 그의 도참설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도참설의 유행은 어지러운 사회의 한 반영인데, 신라 말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승려 도선에 의해 주창되어 민심의 불안에 영합하다가, 고려조에 와서는 지배자나 호족 등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도참은 신탁이나 천계(天啓)에 의하여 신비적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미래기로서 그것은 이른바 역성혁명의 대변동기에는 물론이요, 기타 외우내환의 시국에 처하여서는 인심을 자극하여 종종의 성패득실을 빚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도사나 숨은 예언가들에 의하여 신탁적 천계적으로 표출되는 도참이 정치운동이나 민중운동(주로 사회혁신)의 지도자들에 의해 원용되는 일이 많았었는데, 그중에는 그들에 의해 도참이 조작되는 수도 왕왕 있었다.
도참은 때와 조건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 진위는 막론하고, 대개 천문사상 도불사상 고유산악신앙사상 및 풍수지리설과 관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일대에 있어서는 특히 풍수지리설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었다.
여하튼 고려사를 살펴보면 대개 고려 왕실은 부도(浮屠)·음양·풍수·도참의 설에 의하여 일어나고, 또 그로 인하여 망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상윤의 설에 따르면, 팔관회는 그 의의와 내용에 있어서 확실히 조선 고래의 신도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처음 신라에서 시작될 때에는 전망사졸을 위하여 천신에게 명복을 빌기 위하여 행하였던 것이니 더욱더 이것은 고신도(古神道)의 행사임이 분명하다. 팔관회는 고려조에서 성종 일대를 제외하고는 각근(恪謹)히 거행되었고, 또 외국의 침범과 같은 재난이 있는 때일수록 한층 정성스럽게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상고에 있어서 민심을 지도하던 신도사상은 시대가 강하하고 유·불과 같은 심오한 철학을 이론의 기초로 하는 외래사상의 압박으로 인하여 상천(上天)을 섬기고 조신(祖神)을 위하는 몇 가지의 신사(神事) 이외에는 그것을 전부 음사, 잡신이라 하여 탄압 일관으로 정책을 행하며, 또 그 신사에 종사하는 무격배(巫覡輩)를 사회적으로 천시하는 경향이 날로 농후하게 되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실시, 과거제도의 실시, 백관의 공복제정 등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에 필요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과거제를 통하여 인재를 선발·등용함으로써 유학을 진흥시키며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고, 지방호족의 중앙관료화를 통해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관리등용시험인 과거시험은 제술업·명경업·잡업의 셋으로 나뉘었다. 시·부·송·책 등의 문학으로써 선발하는 제술업이 서·역·시·춘추 등 유교의 경전으로 선발하는 명경업보다 중시되었다. 이는 당시의 귀족들이 경학보다는 문학을 숭상하던 풍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 들어서도 계속되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천유학에서 멀어지는 폐단을 낳음으로써 결국 민생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시험관은 지공거(知貢擧)라 하였는데 이에 임명되는 것은 지극히 영예롭게 생각되었다. 지공거와 급제자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어 그 예(禮)가 부자(父子)와 같았다. 그 관계는 일생을 통하여 계속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파벌, 학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패거리 작당은 그들의 출세에도 배경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등용제도를 동시에 갖기를 원했었다. 그것이 음서제도였다. 음서는 5품 이상 관리의 한 아들에게 관직을 허락하여주는 제도인데, 고려가 문벌을 존중하는 귀족사회였음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음서제도는 권력을 장악한 가문에 의하여 남용되어서 특정 가문의 세력을 확대시키는 구실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제도는 약간의 손질을 거치면서 그대로 존속되었다.
고려 초기의 유학에서는 위와 같이 초기 유학을 개관하며, 이어서 훈요십조, 풍수도참설, 팔관회와 고신도, 과거와 음서제도로 항을 나누어 그 대강을 약술하였고, 최승로의 시무28조와 최충의 사학(私學)(十二徒)과 관학(官學)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별도로 서술하고자 한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3번째로 '최승로의 시무책과 최충의 사학'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