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⑬] 최승로의 시무책과 최충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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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⑬] 최승로의 시무책과 최충의 사학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5.2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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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유교 통치 기반...최승로 정교(政敎) 확립...최충 교학(敎學) 대성
최승로 시무소 통해 유교이념 현실적 구현 노력
최충 ‘해동공자’칭송 불구 조선 때 문묘종사 배척

[목포시민신문] 신라 말엽의 유학에서는 우선 유학의 근본 사상인 인·····(仁義孝悌忠信)을 기본 덕목으로 하는 유학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인격 도야에 힘쓴 다음, ()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오경강독(五經講讀)을 전공과목으로 다루었다. 아울러 이때는 문장학의 대표서적인 문선과 역사와 사리를 밝힌 사자서(史子書)가 교양과목으로 읽혀졌다. 그리하여 일단 유학자로 일컬어지면 도덕·문장·사리·법도 등의 유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실제로 국가의 일을 관장하던 사람은 불승(佛僧)이나 도사(道士)가 아니라 유학자였으며, 이들은 난세를 당해서는 군대에 투신하여 군정을 지휘하는 참모가 되었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조직과 정치 행정의 규율을 확립하고 시행하는 주역이 되었다.

고려 창업기에 왕건을 도운 유학자로는 홍유, 최응, 최지몽, 최언휘, 최승로 등이 있었다. 창업파 홍유와 최응이 원시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역성혁명사상, ·····신 등의 덕목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다면, 경주파 최언휘와 최승로는 한당 유학의 경학 이론과 전장 제도를 통해 정치 구조와 통치 질서, 학술 진흥과 인재 교육을 위한 제도 등을 갖춤으로써 고려에서 유학이 뿌리내리도록 하였다.

특히 고려 유학을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제6대 성종과 최승로 그리고 최충을 들 수 있다. 성종은 고려의 역대 임금 가운데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임금으로, 유교의 왕도정치를 가지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삼았다. 이로부터 고려의 국시(國是)는 사실상 불교가 아닌 유교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교의 영향은 컸다.

최승로(927,태조10~989,성종8)는 경주계 유신(儒臣)으로서 12세 때부터 태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고려조 여섯 임금을 섬긴 원로 유신이었다. 성종은 왕위에 즉위하자 임금의 덕은 오직 신하의 보필에 달려 있으니, 시정(時政)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논하여 올리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최승로는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의 오조치적논평(五朝治績論評)과 함께 시무28조소(時務二十八條疏)를 올렸다.

최승로는 오조치적논평 서두에서 고려 통일 이후 태조 이래로 혜종·정종·광종·경종에 이르기 까지 47년간 다섯 임금의 정치의 득실과 선악을 개진하며, 이를 거울로 삼아 정치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특히 그는 고려 초기의 여섯 임금을 섬겼으므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논평을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 평론은 우리 정치사에서 첫 번째로 꼽아야 할 뛰어난 평론이며, 더욱이 후세의 위정자들 또한 길이 감계로 삼을 만하다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그의 시무이십팔조소에 못지않은 것이다.

시무소(時務疏)는 오늘날 22조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주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당시 시폐(時弊)의 시정을 논한 것이었다. 나아가 최승로는 성종을 보필하여 시무소를 통해 유교이념의 현실적 구현에 노력하였다. 최승로가 고려 유학을 정교(政敎) 면에서 확립했다면 최충은 교학(敎學) 면에서 대성시켰던 것이다.

최충(984,성종3~1068,문종22)의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주인(海州人)이다. 외모가 우뚝하고 성품이 온화하며 곧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는데, 다섯 임금을 섬겨 인망(人望)이 아주 중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고려는 비로소 국자감을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선비들이 모두 시((과거(科擧)의 업()을 힘쓸 뿐이고, 경학(經學)에 종사하는 이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 11대 문종 때에 이르러 문헌공 최충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후진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문교가 성대하게 일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구재의 생도를 일컬어 최문헌공도라 부르고 최충은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송하였다. 이것은 또한 동방 사립학교의 시작이다. 이때 최충이 교도하는 학과 내용은 구경삼사(九經三史)였고, 학문을 권장하여 나아가도록 한 목표는 인의(仁義)와 인륜도덕(人倫道德)이었다고 전한다.

최충은 북송 초기의 성리학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유학을 성리학적인 방향으로 전화시키려는 참으로 새롭고 획기적인 시도를 감행하였던 유학자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유학사의 흐름 속에서 최충을 평가하자면 해동야승중경지에 실린 것처럼, “실로 우리나라 리학(理學)을 창시하고(寔我東方理學之祖)” “성리 학설을 최초로 주창한 선생(先生首倡性理之說)”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유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을 이끌었던 최충은 북송의 경우보다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성리학을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제창하였다. 북송보다도 앞선 출발을 보였던 고려의 유학이 어째서 북송에서 배워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최충과 같은 위대한 성리학의 선구자가 이미 출현했는데도 어째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중국의 성리학을 남송이나 원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학문인 양 경탄을 아끼지 않으며 수입해야만 했는지 철저한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서예가 가원(佳苑) 이춘금 작 '해납백천(海納百川)’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모든 학문 사상은 하나로 귀일하여 융회관통하는 것).

고려에서는 최충의 사학(私學)이 사학으로서 계속 발전하지 못한 채 마침내 관학화(官學化)되어 과거를 준비하는 관리 양성 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 또한, 조선에서는 최충의 사학을 폄하하면서 그의 학덕과 교육적 위업마저 묻어버리려 애쓰기도 하였다.

최충은 사후 선종 3(1086)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우리나라에 학교를 흥기시키고 학문 진흥에 공헌하였음을 찬양하여 그를 해동공자라 추앙하였다. 그는 누대의 유종(儒宗)이요 정계의 원훈(元勳)으로서, 큰 정치적 업적을 남겼으며 교육가로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 경학(經學)과 유술(儒術)로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 되어 후세에 모범을 드리웠던 것은 한국유학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획기적인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처럼 흥기사문(興起斯文)’의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들어 성리학자들은 해동공자의 칭호를 듣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폄하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일부에서 여러 차례 문묘종사(文廟從祀)의 건의가 있었으나, 성리학자들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평가기준에 따른 논란으로 종사(從祀)의 영광이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율곡(栗谷)에 의해서도 폄척 당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그가 이룩한 교육사업과 유학진흥의 공을 지나치게 내리깎은 것으로서, 일세의 유종(儒宗)이요 해동공자의 칭호를 받는 그에게 실로 가혹한 처사라 할 것이다.

고려의 귀족들이 문벌을 존중하는 풍조는 유교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사학(私學)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었다. 문종 때에 해동공자라고 불리던 대유학자 최충이 9개의 전문 강좌로 나누어 강의하는 구재학당(九齋學堂)을 만들었는데, 이를 최공도(후에 문헌공도)라 하여 사학의 시초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최공도를 비롯하여 12의 사학이 있었으므로 이를 십이도(十二徒)라 불렀다. 최충이 문하시중이라는 수상직에 있던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십이도의 창설자는 대부분이 전직 고관이었고, 또 당대의 대학자로서 과거시험의 지공거였던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모든 조건은 문벌 존중의 경향과 함께 귀족의 자제들로 하여금 관학인 국자감보다는 사학인 십이도에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풍조를 낳게 하였으며, 이 결과 학벌이라는 새로운 파벌 관념 또한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학의 융성은 관학의 부진을 초래하였으며 이를 우려하여 관학의 진흥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왕들이 나오게 되어 관학 기관을 정비하였다. 이때 설립된 십이도가 그 뒤에 더 확대 발전되지 못하였던 배경에는 국가의 통제나 예종과 인종 때 일어난 관학의 견제가 있었다. 결국 예종 때부터 국학(國學)(즉 관학)의 흥성과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때나마 흥성했던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는 점차 답보 상태에 들어갔으며, 공양왕 3년에는 아예 혁파되고 말았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14번째로,' 고려 중기의 유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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