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⑭] 고려 중기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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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⑭] 고려 중기의 유학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5.27 08:4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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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확산 토속신앙 음양사상 풍수도참설 등 기반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목포시민신문] 이 시기는 주자학의 수입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북송 성리학풍의 발흥과 함께 유가 경전의 궁중 강론을 이끌었던 경학유(經學儒), 서적의 정리와 간행작업에 이어 역사의식의 대두와 함께 사서(史書)의 저술로 나타난 사학유(史學儒), 사장(詞章) 풍조의 부화(浮華)로 무신난(武臣亂)을 초래한 시문유(詩文儒), 송대 문풍(文風)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이취주의(理趣主義) 경향의 문학유(文學儒) 등이 차례로 나타났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고려 중기 유학은 문종 이후 예종에 이르러 북송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시문보다 경학에 주력하면서 청연각을 중심으로 중용이 강론되었다는 것과 인종과 송의 사신과의 문답 등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이미 그 이전부터 북송 신유학이 연구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김인존(?~1127)은 예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시강학사가 되어 논어신의를 편찬하여 강의했다고 하니, 이미 고려에서도 북송의 정명도·정이천과 같은 새로운 경의 해석이 일어나게 되었음은 확실하며, 주희의 성리학(주자학) 이전의 초기 (북송)성리학이 고려에 전입되지 않은 듯이 믿어왔던 종래의 추정 또한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고려에서의 성리학 발흥은 최충의 구재(九齋)에서도 보듯이, 늦잡아도 11세기 후반부터라고 하겠다. 다만 그 초기 성리학을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따르지 않았을 따름이다.

고려에서 출판 인쇄술이 일찌감치 발달하여 간행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던 일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의 판각과 인쇄작업은 주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먼저 유교경전에 대한 간행작업이 진행된 다음에 불경의 간행작업으로 옮겨갔다. 결국 고려에서 이루어진 학문의 발전은 출판 인쇄술의 발달이나 유학에 대한 우리 나름의 소화와 재창조에 힘입은 것이었다. 합리적인 유교문화가 토착화하며 유교적 역사의식 또한 대두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의 유교 사관과 역사 편찬 방법을 본받아 우리 민족의 신화 전설이나 모호한 역사의식 속에서 써진 역사 기록들을 과감히 취사선택하여 편수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이다. 김부식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기술하되 그렇지 못한 내용은 유보해 두는유교의 역사 편찬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기자조선은 인정하면서도 단군조선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단군신화를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의 건국신화에 대해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나아가 이러한 내용을 믿는 태도나 민중의 무속신앙을 부끄럽게 여겼다. 결국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 성격이 사대주의(事大主義)와 반전통주의(反傳統主義)라는 비판과 함께 역사 자료 인멸의 책임 또한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신채호는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까지 혹평하였던 것이다.

고려 중기에 접어들어 유교의 확산은 토속신앙 그리고 음양사상과 풍수도참설 등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것은 민족적 토속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외래사상인 유교가 민족 고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속신앙 세력들이 유교적 문치(文治)를 불쾌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유교 정치의 사대주의에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조야에서는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모화사대파(慕華事大派)’와 토속신앙 세력 및 음양·도참 사상가들이 중심이 된 국수자강파(國粹自强派)’로 나뉘었으니, 전자는 김부식이 영도했고, 후자는 정지상과 묘청이 주도했다. 이러한 사대주의에 분연히 맞섰던 묘청을 중심으로 한 토속신앙 세력의 반발은, 먼저 왕도를 경주파 유학자들에 의해 점거된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결국 묘청은 반란을 일으켜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이러한 묘청의 난은 반란의 주동 인물인 묘청·정지상 등과 사상적·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여있던 김부식 형제들과 이들을 신봉하던 관료 유학자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신채호는 이 전역(戰役)의 실상은 즉 낭·(·)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라 하고, 또한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郞家)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더니 돌연히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광망하여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었다.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남에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는 창업이 곧 이 사대주의로 성취됨에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됨에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도 신라 향가(鄕歌)의 여맥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곧 소멸되어 버리고 한문학이 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과거제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유송(游松) 조병연 화백의' 월매(月梅)'

고려 과거제도의 핵심은 진사과와 명경과였다. 과거의 운용이 시간이 흐를수록 진사과 위주로 흘러서 지식층의 취향은 자연히 경전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을 외면하고 시부(詩賦)를 짓는 사장풍(詞章風)으로 흘러갔다. 이런 경박한 한묵(翰墨)의 풍조를 바로잡아야 할 책무가 궁극에는 임금에게 있었음에도, 이 무렵의 임금들은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동조하여 더욱 조장하는 태도를 보였다. ‘문신월과법(文臣月課法)’이라 하여 문신들은 왕명에 의하여 매달 시를 지어 바치는 것이 상례였고, 수학 도상의 학생들은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하여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지어 문재(文才)를 겨루기도 하였다. 예종 때부터 일기 시작한 시문유의 부화한 기풍은 인종 때를 거쳐 의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武臣)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문신(文臣)보다 열세에 놓여있었으며, 무신은 갈수록 천대받고 문신에게 사역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천대는 태평호문지주(太平好文之主)’라 불리며 문약과 황음 향락으로 실정을 거듭한 의종 때에 극에 달하였다. 홀대와 천시에 모욕을 참다못한 무신들의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불만과 울분이 일시에 폭발하였으니, 이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의종 24(1170)의 무신의 난(경인의 난)인 것이다. 무단독재의 무인집정은 거의 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묘청의 난, 무신의 난에 이은 최씨 무인정권에 저항하여 유···(儒佛道仙)에 두루 미치면서 청담을 즐긴 이른바 해좌칠현등이 출현하여, 드디어 이인로·이규보·최자 등의 문학유 등이 나타나 북송의 소동파·황산곡 등의 시문평론을 도입하고 시풍을 바꾸어 놓았다. 이들 문학유를 대표로 하는 것이 바로 고려 중기 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무인정권 시기의 유학자들도 건전한 유학 연구의 기풍보다는 대체로 사장학(詞章學)의 기풍을 조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초기 성리학에 해당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문학유들의 시와 문장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에서 유학의 전개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학교를 세워 교육을 장려하였고, 조정에서는 왕도정치를 지향해 나갔으며, 민간에서는 윤리도덕의 질서를 교화시켜 나가는 등 점차적으로 유학의 수준을 착실하게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성종과 문종 때, 즉 고려의 중기로 접어들면서 사학이 일어나 경···집 등을 폭넓게 탐구하며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켰고, 그 뒤 예종과 인종 때에는 관학을 정비하고 경학을 숭상하며 강론에 힘을 쏟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유학의 토착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시문을 중시하는 사장의 학풍이 흥기하더니 점차 부화에 빠져들었고, 게다가 무()를 경시하는 태도가 지나쳐 무인들을 자극함으로써 끝내는 무인들에 의해 문사들이 일망타진되는 불운한 사태를 몰고 왔다. 무신의 난은 고려의 문인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이러한 재앙 때문에 유학은 암흑기로 접어들었고, 그 결과 고려에서는 중국에서 발전한 신유학을 100여 년이나 뒤늦게 받아들임으로써, 학술 사상의 발전이 중국보다 100여 년이나 뒤처지고 말았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5번째 이야기로 '신진사류의 진출과 성장'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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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5-27 23:15:49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05-27 23:15:16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

윤진한 2021-05-27 23:14:41
문화강국이었습니다. 물론 유교, 유교 경전, 문학, 역사학,철학, 법학등에 중점을 두어, 과학기술 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육성하지 않아, 근대에 서유럽의 과학기술에 밀리며, 침체기를 겪었지만, 한국은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강한 나라중 하나로 다시 발전의 계기를 맞고 있습니다. 역사는 동아시아, 서유럽정도의 문명이면, 한때의 침체기를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

윤진한 2021-05-27 23:13:39
유교는 학문적 영역에서 훈고학,성리학,양명학,고증학으로 변천되어 왔습니다. 해석이 조금씩 다양해지고 발전해서 그렇지, 그 근본은 유교 경전으로 토대는 변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세계사로 황하문명, 한자, 유교를 만들어낸 나라고,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아편전쟁 이전까지)까지 세계의 중심국가였습니다. 또한 세계사의 정설로 세계 4대 발명품은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 인쇄술입니다. 한나라때 동아시아에 성립된 유교국(중국,한국,베트남,몽고)중 하나인 한국은 우수한 황하문명의 수혜자로 유교와 한자등이 수천년 체화되어 왔습니다. 우수한 유교문화로 삼국시대,고려시대는 세계와 교역하며 발전했습니다. 오래 유교문화를 이어받은 조선은 기록이 강한 나라로, 세계적으로 보아도 기록이 강한 문화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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