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읽기 박정용 문태고 교사] 목포가 사는 길 – 인문학적 랜드마크를 발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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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읽기 박정용 문태고 교사] 목포가 사는 길 – 인문학적 랜드마크를 발굴하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6.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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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용 문태고 교사

[목포시민신문] 요즘 우리는 문화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고 있다. 한 국가의 수준 높은 문화는 그 구성원들의 품격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제공 해준다. 자연스럽게 높은 문화적 자산을 가진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 되고 강대국이 된다. 김구 선생은 독립된 조국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문화 강대국이 되기를 소원하였다.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 가운데 가장 으뜸이요 바탕이 되는 것은 과학기술이 낳은 물질 문명 보다는 인문학 정신에서 오는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을 일찍이 일깨워 주었다.

우리나라가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계기는 수출을 잘해서, 스포츠를 잘해서가 아니다. 바로 한류속에 보편적 가치를 녹여낸 우리의 문화가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자리 잡아 가면서 비로소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그러면 목포가 인정 받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목포가 가진 인문학적 자산을 가꾸는 일이다. 자연적 랜드마크인 유달산도 좋고, 인공적 랜드마크인 해상케이블카도 좋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품어 주고 이어줄 인문학에서 산출된 문화적 자산이 없다면 목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문학적 자산이 목포가 자랑할 만한 풍성한 음식에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남도의 전통에 있고, 민주적 시민의식에도 있겠지만 목포가 가진 역사적 유산을 되살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목포는 광개토태왕, 세종대왕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역사적 인물인 이순신 제독과 인연이 깊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가장 극적인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지금 이분의 이름으로 사는 곳이 대표적으로 여수와 통영, 그리고 한산도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거기에 부산시도 임진년 부산포 해전에서 승전한 날인 양력 10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놓고 그분과의 인연을 이으려고 하고 있다.

목포는 어떠한가? 우리 역사에서 구국의 영웅인 이충무공을 전면에 내세운 적이 있었던가?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목포와 이순신이 의미 있는 관계가 있었던가 하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노적봉도 있고, 그 건너편에 동상도 있고 고하도에 가면 이충무공 기념비도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제독은 420여 년 전 지금의 목포에게 그분을 널리 알리고 드높일 만한, 그래서 목포가 문화적 자산으로 가꾸어 자랑스럽게 품고 살아갈 만한 충분한 선물을 남겼다.

정유년 78일 칠천량에서 단 한 번의 해전만으로 막강했던 조선 함대가 왜군에게 거의 전멸에 가깝게 무너졌다. 이후 충무공은 다시 통제사가 되어 13척으로 916일 명량에서 천운으로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게 된다. 하지만 적들이 물러갔다고는 해도 남해바다는 이미 더 이상 조선 수군의 안마당이 아니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 후 한 달 이상을 안전하게 머물며 왜군을 막을 적절한 군영을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던 조선 함대는 마침내 발음도(팔금도)를 떠나 1029일 보화도(고하도)에 진을 치게 된다. 그날의 일을 난중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맑다. 밤 두 시쯤에 첫 나발을 불고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는데 벌써부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살살 불다.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로 옮겨 정박하니, 된 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보화도에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하다.’

여기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고금도로 옮겨가기 전까지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고 영산강 물길이 닿는 깊숙한 내륙을 보전함과 동시에 깨어진 함대를 재건하게 된다. 중앙 조정의 그 어떠한 도움도 없이 홀로 군사를 모집하고, 판옥선을 새로 만들고, 군량미를 비축하고, 인근 고을들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피난민들을 돌본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지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고하도 통제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많은 부분 동원이 되었겠지만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한 합리적 추론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다.

충무공은 인근 고을 영암, 무안, 해남 등지에서 목수들을 모으고 소나무를 베어와 판옥선을 만들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108일 동안 고하도 통제영에서 건조한 군선만 40여 척이었고, 명량해전에 출전할 때 병력이 1천여 명 이었으나 고하도에서의 병력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이 숫자는 사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총통을 비롯한 무기와 화약도 새로 만들고 화살도 인근 고을의 대나무를 베어다 만들었다. 다음 해 무술년 217, 고하도에서 함대를 재건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이 생기자 진을 왜적이 가까이 있는 고금도로 전진시켰다. 부분적이지만 전라도 해안의 제해권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목포진과 고하도 통제영은 비록 석 달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충무공이 노량에서 마지막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무찔러 지긋지긋하고 기나긴 7년 전란을 끝낼 준비를 차곡차곡 한 곳이다.

이렇듯 목포와 고하도는 우리 국난 극복 역사에서 너무나도 큰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이 부분을 목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문학적 자산으로 살려내자는 것이다. 이것으로 목포가 자랑할 만한 인문학적 랜드마크로 삼아 지역의 품격을 높이자는 것이다. 왜장 고니시의 왜성이 있었던 순천시도 정유재란을 기념하여 한··일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그런데 목포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이 순천 왜성만 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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